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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덩이들

누군가 성당에 돌덩이를 잔뜩 들고 왔습니다. 볼리비아 코차밤바라는 도시에 ‘우르꾸삐냐’라는 지역에서 성모 발현 기적이 있었는데 그 언덕의 돌덩이들입니다. 사람들의 민간 신앙은 그 언덕의 돌을 가져와서 집에다 모셔다 두면 돈을 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일종의 그리스도교 문화 안의 부적인 셈입니다.

그래서 나가서 설명했습니다. 저는 이 곳의 문화는 존중하지만 그걸 축복할 수는 없다고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 돌덩이들을 쳐다보면서 ‘덕행’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오직 ‘돈벌이’만을 생각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라서 그렇다고 설명 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들은 동의를 했고 미사를 드리는 동안 잠시 제의방에 치워 두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이 사람들은 제 말을 존중했습니다.

사람들은 원하는 걸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과하게 원하지요. 즉, 여러가지 것들을 무시하고 파괴하면서까지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면 다른 이들이 뭐라고 생각하고 어떤 영향을 받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들이지요. 탐욕이 도를 넘어서는 경우들입니다.

엉뚱한 믿음 하나 때문에 그 무거운 돌을 이리 저리 지고 나르는 이들,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닌 엉뚱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성사를 엉망으로 보고, 또 평소의 삶에서도 전혀 괴로워할 이유가 없는 것에도 마음을 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는 반면 정말 신경써야 할 ‘선과 사랑’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지요. 예수님을 초대할 때에는 마음을 준비해야지 방석 색깔을 신경쓸 필요는 없는 셈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돌덩이들은 우리 스스로 지고 온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지고 나가야 하고 가능하다면 갖다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돌덩이들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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