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십자군 전쟁이 있었을 적에 사람들은 그 전쟁의 정당성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교황 바오로 2세께서는 과거의 교회의 오류를 뉘우치고 사죄를 청하셨지요.
우리 교회의 강점은 그 어떤 잘못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늘 오류를 수정해 나가는 데에 있었습니다. 역사 안에서 수많은 잘못과 오류들은 존재해 왔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것을 수정해 나간 것이지요.
하지만 이 수정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다수결의 원칙으로? 아니면 법적 조항에 빗대어서? 만일에 법 자체가 어긋나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똑바로 선 기준점은 부러진 기준점을 많이 모은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올바른 기준점이라 함은 올바른 방향을 인지하고 있는 이가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의 방향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 가장 길을 잘 찾게 됩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예수님 말고 다른 길은 없다는 말이 되지요.
때로 자신이 길이라고, 마치 자신을 따라오면 뭐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만이 지표가 될 것입니다.
여러 이방 민족들에게는 ‘예수’라는 이름이 아직 생경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가장 완전한 사랑’이라는 이름은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교를 할 때에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그 밖의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강점은 그 어떤 잘못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늘 오류를 수정해 나가는 데에 있었습니다. 역사 안에서 수많은 잘못과 오류들은 존재해 왔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것을 수정해 나간 것이지요.
하지만 이 수정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다수결의 원칙으로? 아니면 법적 조항에 빗대어서? 만일에 법 자체가 어긋나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똑바로 선 기준점은 부러진 기준점을 많이 모은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올바른 기준점이라 함은 올바른 방향을 인지하고 있는 이가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의 방향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 가장 길을 잘 찾게 됩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예수님 말고 다른 길은 없다는 말이 되지요.
때로 자신이 길이라고, 마치 자신을 따라오면 뭐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만이 지표가 될 것입니다.
여러 이방 민족들에게는 ‘예수’라는 이름이 아직 생경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가장 완전한 사랑’이라는 이름은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교를 할 때에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그 밖의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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