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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성체성사, 미사)

진정으로 신앙의 정통성을 탐구하는 진지한 개신교 형제들이라면 늘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찬례’ 즉 ‘미사’입니다. 왜냐면 개신교는 자신들이 ‘정통성’을 유지한다고 주장하는데 시대 안에서 그 정통성의 뿌리가 갈라지기 이전에도 수많은 성인들은 ‘성찬례’에 대한 강조를 거듭 하였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의 미사는 그 엄숙함과 거룩함에서 타 예식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곧잘 엄숙하고 거룩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미사의 장면, 또는 미사가 드려지는 성전의 장면을 담아내곤 하였지요.

성찬례의 근본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우리가 매번 미사 안에서 반복하여 듣게 되는 말이지요.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래서 우리는 미사 안에서 빵을 나눕니다. 바로 예수님이 당신의 몸이라고 선포하신 그 빵을 나누지요. 하지만 단순히 그 빵을 받아먹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주시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세상에 먹히는 빵이 되라고 모범을 보이시며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거룩한 성찬례 이후에 십자가에서 산산 조각이 되어 죄인들을 위해 먹히는 빵이 되셨지요.

가톨릭 신자들의 부족함은 여기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성찬례’만 참례하고 그 성찬례의 본질적 가치를 삶 안에서 구현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신교 형제들의 비판은 때로는 정당합니다. (물론 대부분 엉뚱한 비방들이 더 많긴 합니다. 성모님을 숭배한다느니, 우상 숭배를 한다느니 하는 식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참여하는 성찬례 안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 즉 예수님의 빵을 보고 그분의 몸이라고 고백하는 그 신앙을 살아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빵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 복음에는 당신의 몸에 대한 가르침,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이 꽤나 많은 분량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제사꾼들이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스스로 빵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빵이지만 수천명을 먹이는 빵이 되기를 바라셨지요. 그 빵은 비록 한 어린 아이의 손에 의해서 바쳐지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기적의 빵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례는 분명히 보물입니다. 시대를 거듭해서 반복되어 강조되어오고 수많은 실례들이 있는 진정한 보물입니다. 가톨릭 신자는 이 보물을 누릴 특권을 지닌 이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특권은 누구보다 잘나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여한 성찬례를 실제 삶에서 살 수 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우리의 특권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며, 따라서 얻게 되는 부활입니다. 그것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특권입니다. 죽지 않는 밀알은 열매 맺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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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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