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자유를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자유가 있다는 것은 늘 선한 쪽으로 방향 지워져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과 악의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향해서 활짝 열려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한 방향입니다. 그것은 가장 완전한 사랑을 향해서 방향지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미흡한 사랑’, 또는 ‘사랑을 흉내낸 사랑’에 불과합니다.
연인을 사랑한다면서 남을 죽여 돈을 빼앗아 반지를 사다주는 사랑은 사실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집착’일 뿐이지요.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참되고 올바름’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런 류의 사랑을 하면서 우리가 사랑 안에 머무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직 하느님을 향한 방향만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바로 세웁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 걸까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일까요?
성당에 나와서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면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건 또다른 집착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로 분석될 수 있겠지만 그런 거룩한 체하는 자신의 명예심일 수도 있고, 인간의 ‘괴로움’을 즐기는 그릇된 하느님의 이미지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신앙을 단순한 행위의 축척으로 간주하는 우리의 오해일 수도 있지요.
하느님은 껍데기에 놀아나지 않는 분이십니다. 묵주기도를 하는 사람은 오직 온 마음을 다해서 하고, 미사를 드리는 사제도 온 마음을 다해서 드리고, 사람들과 만나면서 일하는 이들도 온 마음을 다해서 한다면 그 안에 하느님이 이미 함께 하고 계시는 셈입니다.
참으로 소중하면서도 온전히 알기 힘든 것이 바로 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약한 존재가 모두 담아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한 방향입니다. 그것은 가장 완전한 사랑을 향해서 방향지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미흡한 사랑’, 또는 ‘사랑을 흉내낸 사랑’에 불과합니다.
연인을 사랑한다면서 남을 죽여 돈을 빼앗아 반지를 사다주는 사랑은 사실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집착’일 뿐이지요.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참되고 올바름’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런 류의 사랑을 하면서 우리가 사랑 안에 머무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직 하느님을 향한 방향만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바로 세웁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 걸까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일까요?
성당에 나와서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면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건 또다른 집착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로 분석될 수 있겠지만 그런 거룩한 체하는 자신의 명예심일 수도 있고, 인간의 ‘괴로움’을 즐기는 그릇된 하느님의 이미지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신앙을 단순한 행위의 축척으로 간주하는 우리의 오해일 수도 있지요.
하느님은 껍데기에 놀아나지 않는 분이십니다. 묵주기도를 하는 사람은 오직 온 마음을 다해서 하고, 미사를 드리는 사제도 온 마음을 다해서 드리고, 사람들과 만나면서 일하는 이들도 온 마음을 다해서 한다면 그 안에 하느님이 이미 함께 하고 계시는 셈입니다.
참으로 소중하면서도 온전히 알기 힘든 것이 바로 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약한 존재가 모두 담아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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