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의 세계는 내면이 구현된 것 뿐이다. 아이폰을 예를 들어보자. 만일 누군가가 아이폰을 상상하지 않았더라면 아이폰이 ‘우연히’ 나오는 일은 없다. 그리고 어떤 일이 ‘우연히’ 발생된다 하더라도 그 우연을 잡아내는 내면이 없다면 그 우연은 지나가 버리고 만다.
예술도 기술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시적인 것들은 비가시적인 우리 내면의 산물인 셈이다. 가시 세계는 변화가 어렵다. 일단 한 번 조성된 것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면은 변화될 수 있다. 그리고 내면이 바뀌면 외적인 것들도 그에 따라서 변화되는 법이다.
우리 나라는 유교 중심의 예의 범절을 중요시하는 사회였고 그에 따른 여러 제도들과 문화 양식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내면이 변화고 있다. 그렇게까지 어른들에 대한 예의를 생각지 않고 보다 자유 분방하고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외적인 세계에 변화를 가하는 중이다.
우리가 어떤 내면을 지니고 있는가로 인해서 외면이 구현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지금 국내외로 일어나는 상황에 개탄을 하지만 그들 역시도 성장하면서 내면이 굳어지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금의 수많은 어른들도 한때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글의 근본 목적에는 우리의 보다 내면적인 것, 즉 우리의 신앙이 달려있다. 신앙이 빠진 내면탐구는 앙꼬없는 찐빵과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면 개혁의 진정한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빛을 통해서 참된 의미의 내면의 변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문제일 뿐.)
영원을 향해서 마음을 모으면 우리의 외면도 변해가게 된다. 하지만 영원을 잃은 외면의 모습이 너무나 많이 드러나는 걸 보면, 그 역으로 우리의 내면이 얼마나 무너져 있고 굳어져 가는지를 알 수 있는 셈이다.
예술도 기술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시적인 것들은 비가시적인 우리 내면의 산물인 셈이다. 가시 세계는 변화가 어렵다. 일단 한 번 조성된 것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면은 변화될 수 있다. 그리고 내면이 바뀌면 외적인 것들도 그에 따라서 변화되는 법이다.
우리 나라는 유교 중심의 예의 범절을 중요시하는 사회였고 그에 따른 여러 제도들과 문화 양식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내면이 변화고 있다. 그렇게까지 어른들에 대한 예의를 생각지 않고 보다 자유 분방하고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외적인 세계에 변화를 가하는 중이다.
우리가 어떤 내면을 지니고 있는가로 인해서 외면이 구현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지금 국내외로 일어나는 상황에 개탄을 하지만 그들 역시도 성장하면서 내면이 굳어지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금의 수많은 어른들도 한때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글의 근본 목적에는 우리의 보다 내면적인 것, 즉 우리의 신앙이 달려있다. 신앙이 빠진 내면탐구는 앙꼬없는 찐빵과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면 개혁의 진정한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빛을 통해서 참된 의미의 내면의 변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문제일 뿐.)
영원을 향해서 마음을 모으면 우리의 외면도 변해가게 된다. 하지만 영원을 잃은 외면의 모습이 너무나 많이 드러나는 걸 보면, 그 역으로 우리의 내면이 얼마나 무너져 있고 굳어져 가는지를 알 수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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