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작다, 약하다고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요? 믿음은 겸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즉, 믿음의 크기는 ‘겸손’의 크기에 비례한다. 반대로 믿음의 크기는 교만의 크기에 반비례한다고 보면 됩니다.
교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교만은 내 안에 무언가를 지니고 있을 때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쌓은 돈, 지식, 명예, 권력에서 교만이 나오지요. 내가 뭐라도 좀 더 잘났고 더 빼어나다고 느낄 때에 사람은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이 클수록 사람에게는 겸손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게 되고, 겸손이 없으면 자연 믿음도 없게 되는 셈이지요.
예수님을 귀찮게 하던 여인에게 예수님은 아주 잔인한 말을 합니다. 처음에는 무시를 하다가 나중에는 대놓고 ‘나는 개밥 안준다.’고 말을 하시지요. 하지만 그 여인은 그 모든 과정을 ‘겸손’ 하나로 거쳐내고 결국 예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감탄할 정도로 말이지요.
우리의 교만은 하늘을 찌릅니다. 우리는 심지어 하느님도 필요없는 지경에 이륵도 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때에는 사실 하느님도 필요 없지요. 뭔가 이상이 있고 불안하고 자리잡혀 있지 않을 때에, 즉 나에게서 굳건하던 토대가 사라져갈 때에 비로소 하느님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믿음이 없다구요? 당연하지요. 당신 안에 지켜야 할 게 너무나 많으니까요. 하지만 걱정마십시오. 하느님이 하나씩 하나씩 토대를 무너뜨리고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 주실 테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은 그 순간에마저도 교만할까 걱정입니다.
교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교만은 내 안에 무언가를 지니고 있을 때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쌓은 돈, 지식, 명예, 권력에서 교만이 나오지요. 내가 뭐라도 좀 더 잘났고 더 빼어나다고 느낄 때에 사람은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이 클수록 사람에게는 겸손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게 되고, 겸손이 없으면 자연 믿음도 없게 되는 셈이지요.
예수님을 귀찮게 하던 여인에게 예수님은 아주 잔인한 말을 합니다. 처음에는 무시를 하다가 나중에는 대놓고 ‘나는 개밥 안준다.’고 말을 하시지요. 하지만 그 여인은 그 모든 과정을 ‘겸손’ 하나로 거쳐내고 결국 예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감탄할 정도로 말이지요.
우리의 교만은 하늘을 찌릅니다. 우리는 심지어 하느님도 필요없는 지경에 이륵도 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때에는 사실 하느님도 필요 없지요. 뭔가 이상이 있고 불안하고 자리잡혀 있지 않을 때에, 즉 나에게서 굳건하던 토대가 사라져갈 때에 비로소 하느님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믿음이 없다구요? 당연하지요. 당신 안에 지켜야 할 게 너무나 많으니까요. 하지만 걱정마십시오. 하느님이 하나씩 하나씩 토대를 무너뜨리고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 주실 테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은 그 순간에마저도 교만할까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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