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내면에는 실제 일어나는 것과 실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일어나는데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데 내가 일어난다고 느끼는 것도 있지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가 밥을 먹습니다. 이는 실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밥을 보고 배고픔을 느끼면 그것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지요. 헌데 내가 밥을 충분히 먹었는데 그가 맛있는 걸 먹는 걸 보고는 나도 먹고 싶어지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바로 이 시점에서 나 스스로의 내면을 살펴보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데 내가 일어난다고 느끼는 것이 됩니다. 나의 욕구는 이미 잠재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다시 무언가를 먹고 싶어지는 이유는 바로 ‘내 정신’이 그것을 다시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그가 밥먹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그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더라도 그 음식이 내가 이미 먹은 것보다 형편없이 못한 것이라면 나는 다시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행동을 통해서 단순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다른 욕망들을 꺼내는 셈이지요.
우리 내면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올바르게 구분할 줄 안다면 우리는 많은 ‘고통’을 예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정신에 달려 있는 셈이지요. 실제로 일어나서 고통스러운 일은 방법을 찾아서 해결하거나 그대로 견뎌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현대인들의 내적인 문제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걸 나 스스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과연 지금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일까요? 아니면 하늘 무너지기를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실제로 일어난다면 내가 할 만한 일을 찾으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하느님에게 간절히 청하십시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실제로는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는 일이 더 많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가 밥을 먹습니다. 이는 실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밥을 보고 배고픔을 느끼면 그것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지요. 헌데 내가 밥을 충분히 먹었는데 그가 맛있는 걸 먹는 걸 보고는 나도 먹고 싶어지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바로 이 시점에서 나 스스로의 내면을 살펴보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데 내가 일어난다고 느끼는 것이 됩니다. 나의 욕구는 이미 잠재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다시 무언가를 먹고 싶어지는 이유는 바로 ‘내 정신’이 그것을 다시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그가 밥먹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그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더라도 그 음식이 내가 이미 먹은 것보다 형편없이 못한 것이라면 나는 다시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행동을 통해서 단순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다른 욕망들을 꺼내는 셈이지요.
우리 내면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올바르게 구분할 줄 안다면 우리는 많은 ‘고통’을 예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정신에 달려 있는 셈이지요. 실제로 일어나서 고통스러운 일은 방법을 찾아서 해결하거나 그대로 견뎌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현대인들의 내적인 문제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걸 나 스스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과연 지금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일까요? 아니면 하늘 무너지기를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실제로 일어난다면 내가 할 만한 일을 찾으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하느님에게 간절히 청하십시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실제로는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는 일이 더 많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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