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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목자와 양
예수님은 그 지역의 문화 속에 실존하셨던 분이고 자연 그 지역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늘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십니다. 그래서 등장하게 되는 대표적인 비유가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오늘날에도 큰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목자를 따르는 순박한 양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단 양들만이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들을 떠올려 보아도 무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목자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목자는 진실되고 속임이 없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언제나 문으로 드나듭니다. 하지만 도둑과 강도는 언제나 곁길로 들어섭니다. 정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언제나 주변에서 서성이다가 빈 틈을 바라보고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같은 것들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식으로 공공연하게 가르침을 받는 것들은 바로 목자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곁으로 슬쩍 다가와서 이상한 가르침을 시작하는 이들이 있으니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들은 도둑이며 강도이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본당에서 복음을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험담을 하면서 따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이들을 조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호기심에, 그리고 교회에 대한 불만에 이런 다른 길을 찾아 나서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 양들은 목자가 누군지를 아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목자의 소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부르면 금새 그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피해 달아납니다. 하지만 양들이 아닌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목자 아닌 이들을 쉽사리 따라갑니다. 그리고 아픈 양들이 있습니다. 올바로 듣지 못하고 올바로 걷지 못하는 양들, 엇나가기 시작하는 양들이고 길을 잃는 양들이지요. 우리는 이런 양 무리를 올바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양이 아니고, 모두가 건강한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들 사이에 침투한 도둑과 강도, 즉 늑대를 쫓을 줄도 알아야 하고, 아픈 양들을 돌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도둑과 강도, 즉 늑대는 쫓아내야 하고 양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 분별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도둑과 강도
이어 예수님은 도둑과 강도, 즉 늑대들을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들의 특징은 ‘문으로 들어오지 않는 자들’입니다. 즉 정문을 두고 언제나 다른 문을 이용하여 들어와서 양들을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아주 일상적인 만남이 아니라 언제나 옆에서 소곤대며 접근하는 이들, 그릇된 정보를 제공하여 속이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자 합니다.

착한 목자
반면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이 다니는 곳이 곧 문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언제나 크고 바른 문으로 들어오십니다. ‘진리, 정의, 선’의 문으로 들어오시지요. 그리고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이것이 착한 목자를 분별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는 자가 바로 착한 목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외에 다른 목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인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삯꾼
여기에서 또다른 무리가 등장합니다. ‘삯꾼’이라 불리는 그들은 삯을 기다리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양들을 돌보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삯을 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평소에는 양들을 돌보는 것 같지만 위협이 다가오면 그 앞에서 양들을 지키려 하기는 커녕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우리에 있지 않은 양
이는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 안에 강도와 도둑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우리 밖에 양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만 아무도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아서 밖에 머물러 있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목소리를 듣게 되면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고 찾아오게 될 이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양들은 한 목자 아래 한 무리의 양떼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는 앞으로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분명한 약속입니다.

다시 얻는 목숨
스스로 내어놓는 봉헌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렇게 선물 받은 것을 더 좋은 것으로 돌려 주십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누리고 남는 것을 하느님 앞에 돌립니다. 그래서 기쁘게 봉헌할 줄 모릅니다. 진정한 봉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목숨은 오직 예수님의 것이고 아무도 함부로 빼앗아가지 못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 목숨을 스스로 내어 놓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행동은 예수님의 독자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일찍부터 당신의 의지를 하느님에게 맡겼고 그래서 당신의 이 행위, 즉 생명을 스스로 내어놓는 행위는 하느님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몰이해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앞에 두고 반으로 갈라집니다. 하지만 둘 다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측은 예수님을 마귀가 들린 사람으로 몰아세우고, 다른 한 편은 예수님의 외적 업적만을 두고 그분을 평가하지만 둘 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배척
예수님이 그렇게나 스스로의 신원에 대해서 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의심하고 또 의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양의 비유를 말해 줍니다. 목자에게 속하지 않은 이들, 즉 예수님의 양떼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반면 예수님은 당신의 양떼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양떼가 되는 좋은 점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가장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뜻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에게 화가 나서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왜 돌을 던지느냐?
누군가가 다른 이를 해치려는 것은 무엇 때문에 화가 나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무언가 예수님에게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걸 묻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난 것인지 말이지요. 사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 자체로 그들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그릇된 행동,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 행동도 하지 않았고 모든 좋은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것은 그들 마음이 뒤틀려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름으로 변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즉 예수님의 좋은 일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하느님으로 자처하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마저도 대답해 주십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신’이라고 불리우기에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은 전혀 그릇된 일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애시당초 예수님을 그릇된 시선으로 바라보았기에 그분이 하시는 선한 행위나 그분이 하시는 진리의 말이나 올바로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잡으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시지요.

요르단 강 건너편

요르단 강 건너편, 그곳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이었습니다. 요한의 기억이 생생한 곳이지요. 예수님은 옛 친구가 그리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다가갑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관계’가 필요합니다. 세상에 혼자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마다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도 알아가는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요한이 한 말을 떠올리며 예수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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