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하나의 인격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즉 우리는 우리 친구를 대하듯이 우리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을 일상적으로 대하듯이 예수님과 마주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단순히 한 종교의 아이콘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어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2000년이라는 시간의 한계와 중동이라는 지역의 한계를 쉽사리 이겨내지 못한다는 데에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곧잘 예수님을 하나의 ‘상징’으로 대해버리고 맙니다. (심지어 누군가는 ‘존재했나?’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남기신 이유는 이 ‘인격적 관계’를 보다 실천적으로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셨고, 지금도 당신의 특별한 제자들과 실제로 함께 살아가십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먹고 자고 마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은 인격적 체험을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제공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훌륭한 신학적 표현이 예수님을 알게 하지 못합니다. 아주 학적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누구든지 만남을 통해서 삶의 영역을 넓혀가기 때문이지요.
앞으로도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함께 머무르시고 사셨다는 이 사실은 여전히 ‘신비’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엄연한 현실을 구체화하고 생활화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같은 체험을 나누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비로소 예수님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은 방금 ‘그리스도론’의 중요한 단락, 즉 예수님의 인격성을 공부하신 셈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어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2000년이라는 시간의 한계와 중동이라는 지역의 한계를 쉽사리 이겨내지 못한다는 데에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곧잘 예수님을 하나의 ‘상징’으로 대해버리고 맙니다. (심지어 누군가는 ‘존재했나?’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남기신 이유는 이 ‘인격적 관계’를 보다 실천적으로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셨고, 지금도 당신의 특별한 제자들과 실제로 함께 살아가십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먹고 자고 마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은 인격적 체험을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제공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훌륭한 신학적 표현이 예수님을 알게 하지 못합니다. 아주 학적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누구든지 만남을 통해서 삶의 영역을 넓혀가기 때문이지요.
앞으로도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함께 머무르시고 사셨다는 이 사실은 여전히 ‘신비’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엄연한 현실을 구체화하고 생활화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같은 체험을 나누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비로소 예수님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은 방금 ‘그리스도론’의 중요한 단락, 즉 예수님의 인격성을 공부하신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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