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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9장 강의록

태생 소경
인간의 질병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질병은 우리의 죄의 결과인 것이 맞습니다. 우리가 너무 과하게 욕심내서 먹지 않았더라면, 잘 절제하고 필요한 것을 취하고 적절히 몸을 돌볼 줄 알았더라면 많은 아픔을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비축해 보겠다는 일념 하에 우리의 몸을 함부로 굴리다가 병을 얻게 되지요. 그리고 그렇게 벌인 것들을 고스란히 다 써버리고 빚마저 지고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의 결과가 아닌 병들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성인들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질병의 일종으로 드러나곤 했지요. 하지만 이러한 류의 고통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고통을 나누어지는 중이었지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희생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아픔들도 있습니다. 바로 복음에서의 예시처럼 ‘태생 소경’의 경우이지요. 이러한 경우는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병’은 당연히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에 이 소경에 대해서도 누구의 죄인가를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하게 못박으십니다. 그 누구의 죄도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물론 세상에는 복음의 경우처럼 기적적으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지 않는 태생 소경도 많습니다. 그들은 소경으로 살아가지요. 하지만 그들의 생존 자체가 실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지요. 그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가 분명히 하느님의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실로암(파견된 이)
이 소경은 전에 없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복음 선포자가 되어 갑니다. 우리는 복음의 이 태생소경의 예시를 통해서 우리의 ‘소경됨’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부터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장 5절) 예수님은 태생 소경을 통해서 상징적인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제자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힐 수 밖에 없는 일을 하셔서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장님들입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이리저리 부딪히고 말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눈을 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먼저 간단한 치유(침으로 만든 진흙)를 하신 후에 우리를 ‘파견’ 하십니다. ‘가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태생 소경은 가서 씻고 난 뒤에 보기 시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을 하십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영적 장님의 상태에 당신의 치유를 하신 다음 우리를 ‘파견’ 하십니다. 미사의 모든 마지막은 ‘파견’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는 파견을 받아 나가서 씻어야 합니다. 그래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첫 치유 이후에 잠들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일을 할 줄 모릅니다. 파견을 받은 것을 이행할 줄 모르지요. 결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안식일 논쟁
예수님이 그런 위대한 일을 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난리가 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태생 소경을 닥달하고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물었던 것을 다시 묻고 또 묻고 그 어떤 오류가 있는지, 그 어떤 작은 실수라도 있는지 찾아내어 벌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리’ 안에서 일어난 일에 그러한 것이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태생 소경은 일어난 일을 솔직하게 대답하고 자신이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진정한 예언자이심을 고백하지요.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시 부모에게 가서 묻고 또다시 소경에게 묻고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태생 소경은 마침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훌륭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 30-33)

하지만 이 진정한 영적인 장님들은 단지 육신의 눈이 멀었을 뿐이던 태생 소경, 지금은 육과 영의 눈이 모두 뜨인 진정한 의인인 태생 소경을 죄인 취급하고 쫓아내어 버립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태생 소경의 신앙고백은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태생 소경은 시련을 당했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진실성을 변호하다가 쫓겨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을 무렵 다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당신을 숨김 없이 드러내시고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라고 하며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이로써 우리는 심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게 되고 보는 이들(본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이들, 탐욕스럽고, 명예와 학식을 자랑하고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교만한 이들은 사실 소경들입니다. 그들은 원래부터의 영적 눈멀음을 더욱 짙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억눌려 있던 이들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은 눈을 뜨고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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