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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들

준주 성범
신학생 1학년 팔공산 중턱에 있는 한티에서 1학년 반학기를 보내기 위해서 갔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때 처음으로 ‘준주성범’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손에는 그 책이 들려 있었고 저는 틈만 나면 그 책을 읽었습니다. 저를 영적인 삶으로 초대해 준 소중한 책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당시의 동기 신학생들은 그런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곤 했었지요. 저도 그럴 것이 마음만 들떠 있었을 뿐, 실제 삶으로는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뭐, 그런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초반부에는 쉽게 읽혔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성체 성사의 영적 신비에 대해서 서술할 때에는 더욱이 이해할 수 없었지요.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남산동에 내려와서 제가 즐겨 찾았던 곳은 신학교 내에 마련된 도서 판매소였습니다. 신학교 부서 중의 하나였던 ‘도서 판매부’에 의해서 책을 들여오고 어떤 책들은 싼 값에 파는 곳이었지요.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을 만난 게 거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뭐 사실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듯 싶습니다. 중요한 건 그 책에 담긴 소중한 영적 가치들이지요. 아마 저는 그 안에 저술된 내용을 당시에는 올바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분들의 그런 삶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한 편으로 엄청난 높이를 실감하기도 했지요. 왜냐면 그런 금욕의 삶은 살아갈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토마스 머튼 신부님
시간은 흘러 신학교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저는 도서관을 참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거기에 가면 나는 책 냄새 만으로도 좋았지요.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무한한 지식을 무척 탐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만나게 된 책이 토마스 머튼 신부님의 책이었지요. ‘칠층산’이라는 자필 전기도 있고 그 밖에도 여러가지 책들이 있지만 제가 만난 머튼 신부님의 특징은 현대라는 동시대를 바탕으로 하는 명백한 설명이었습니다. 물론 신부님의 ‘정말 많은’ 저술들을 읽으면서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긴 했지만 글 속에 숨겨진 분명한 방향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
또 한 분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있으니 바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입니다. 그분의 책들은 비록 번역된 지가 오래되었다는 한계로 읽기가 힘들었지만 그분이 설명하려는 내용의 빛은 전혀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고백록’ 안에서 전하는 당신의 신앙체험과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설명해 내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서술은 참으로 소중한 내용이었지요.

비오 신부님
제 삶에서는 비오 신부님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오상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고 그분에 대해서 더 알게 하는 좋은 수단이었지요. 그리고 만나게 된 그분의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에 대한 신심은 저를 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비오 성인은 단순히 오상을 받은 기이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간 현대의 예언자였고 세상의 회개를 위해서 고통받도록 선택된 인물이었습니다.

영성/신비 신학
사제가 되고 나서 만나게 된 두 분의 성인이 있으니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과 예수의 데레사 성녀입니다. 두 분 다 위대한 신비 신학자로 손꼽히는 분들이지요.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본은 비록 옛 말투가 그대로 남아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분은 두 분의 소중한 저작을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말로 풀어내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저는 본격적인 내면 공부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이 밖에도 마더 데레사, 파티마의 기적, 그 밖의 여러가지 영적 자산들이 풍부하게 있습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런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지요. 헌데도 사람들은 이상한 가르침을 더욱 좋아하는 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전혀 엉뚱한 가르침인데도 소위 학식 있다는 사람들이 더 달려들고 있지요.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에 나열된 모든 성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예수님 중심’이고 ‘교회에 대한 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분들은 모든 생활의 중심에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닌 예수님이 계셨고 그리고 그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에 철저하게 순명하셨습니다. 이 두 줄기만 지킬 수 있다면 우리가 크게 엇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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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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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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