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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거룩한 변모

오늘 젊은이들 미사에 제가 강론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가워요. 여러분 과연 ‘젊다’는 건 뭘 의미할까요?

저마다 의견이 나왔습니다.

- 어린 거요. 기쁨이요. 사랑이요.

-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젊다는 건 ‘힘있음’이예요.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젊음으로 얼마든지 달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지요. 여러분들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서 달리기도 하고 뭔가 맘에 드는 것에 마음을 쏟기도 하고, 이렇게 젊은이들이 모이는 축제에 달려가기도 하고… 여러분들의 젊음은 저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문제는,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의 주체하지 못하는 힘을 어디로 이끌어 갈 것인가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이런 유혹에도 빠지고 저런 유혹에도 빠지게 되서 결국 그릇된 선택을 하곤 하지요. 누군가는 섣불리 호기심에 담배에 손을 대었다가 중독이 되고, 또 누군가는 술을, 또 누군가는 일찍부터 성에 관심을 가져 철없는 임신을 하기도 하지요.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바로 오늘 복음에 답이 있지요.

예수님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올라간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이동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들어높이는 것을 말하지요. 그러면서 베드로 사도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를 데려가지요.

베드로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배를 타고 겁에 질려 있을 적에 베드로는 믿음으로 발을 내딛었고 몇 걸음 걸었지요. 물론 빠지긴 했지만 말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약한 믿음을 상징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예수님 앞에 와서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걸 청했지요. 따라서 야고보 사도는 ‘희망’을 상징합니다. 우리 역시도 하늘 나라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요한 사도는 십자가 밑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의 죽음을 지킨 사도입니다. 즉 ‘사랑’이지요.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세 명의 사도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모습이 변모하시지요.

우리도 이 ‘믿음, 소망, 사랑’으로 마음을 들어 높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산 정상에서는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였지요.

모세는 ‘정화된 믿음’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큰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지요. 그리고 지금은 하늘 나라에서 복을 누리고 있는 자입니다. 따라서 그는 ‘정화된 믿음’을 상징합니다.

엘리야는 예언자로서 이런 저런 것들을 미리 이야기를 했지요. 따라서 엘리야는 ‘정화된 희망’을 상징합니다. 그가 바라던 것들은 모두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었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시지요.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미흡한 ‘믿음, 소망, 사랑’으로 살아가지만 저 세상에서 진짜배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는 이야기가 품고 있는 내용이고 결국 예수님이 올라가신 곳은 바로 지금 여러분이 있는 이 자리, ‘미사’의 자리였습니다.

여러분 미사를 올 때에 세상적인 욕구를 가지고 오나요? 돈 벌려고? 아니면 명예를 위해서? 아닙니다. 미사는 앞서 말한 세 가지 ‘믿음, 소망, 사랑’을 통해서 보다 본질적인 모습에 이르는 거룩한 성사입니다.

여러분들은 젊습니다. 하지만 방향을 잘 정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마음 속에 하느님이 있으면 모든 것은 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 마음 속에 하느님이 없으면 여러분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결국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들의 젊음을 누리십시오. 하지만 올바른 방향 안에서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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