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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교사

“수년 동안 교회에서 봉사하던 교리교사가 냉담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 때문에 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제 교리교사 모임을 하면서 주제를 꺼냈습니다. 교리교사는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었지요.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라는 이상향을 공유하면서 ‘이 땅의 현실’ 속에 머물러 있는 아이들을 이끌어야 하는 안내자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즉 우리의 이상은 드높이 있지만 아이들은 그 이상에 관심이 없고 현실 속에서 여전히 자신들이 좋아하는 걸 찾는 중이지요.

그래서 교리교사는 두 가지를 신경써야 합니다. 첫째로는 우리의 이상을 굳건히 다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해도 그 모든 일은 의미가 퇴색되어 버리고 맙니다. 남들에게는 열심히 영원을 찾으라고 하고선 스스로 영원을 저버리는 위선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리교사가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의 올바른 방향정립입니다.

교리교사생활도 자꾸 하다보면 길이 들게 마련입니다. 처음에나 신앙학교를 준비하는 게 힘들지 몇 년 지나고 나면 마치 전문직의 기술자처럼 일을 처리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런 ‘행사들’이 아니지요. 문제는 우리의 방향성입니다. 아무리 일을 손쉽게 잘 처리해내는 경력있는 교사라 하더라도 스스로 냉냉한 가슴을 지니고 있다면, 차라리 일을 서투르게 해도 뜨거운 열정으로 하는 신입 교사가 보다 나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성공관’에 사로잡혀 보다 나은 행사를 치뤄내려고 합니다.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을 끌어모으고 얼마나 일들이 완벽하게 진행되는가를 보려고 하지요. 하지만 이 생각부터 잘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세상적인 성공이 교회의 신앙 생활에서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지요. 차라리 겉으로 드러나는 수량에는 실패한 것 처럼 보이더라도 그 순간에 구성원들이 최선을 다해 진정으로 마음을 모으고 보다 참된 방향을 위해서 열심히 이끌고 노력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욱 성공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효율성, 수량과 같은 것은 세상의 이익집단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교리교사라면 보다 내밀한 진정한 방향을 정립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교사회의 일은 경력이 있어서 너무나도 잘 해내기만 하면, 훗날 나중에 교사회를 떠나고 나면 신앙생활의 의미를 상실하고 냉담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실 그는 하느님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 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했다는 걸 반증하는 셈이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수많은 교리 지식과 교육학적 방법론을 완전히 습득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하고 신심있는 교리교사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아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교리교사가 되십시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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