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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상자

어느 귀인이 지나가는 길에 만나게 된 친구에게 자기가 없는 동안 잘 활용하라며 물건이 든 상자 하나를 맡겼습니다. 하지만 다른 물건들이 잔뜩 있었던 그 친구는 받은 상자에 대해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맡은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로 소홀히 다루었습니다. 겉으로는 이뻐 보이는 상자였기에 한동안은 방 한구석에 장식을 해 두었지요. 하지만 결국 그마저도 잊고 말았습니다. 물건은 창고 구석에 처박히게 되었고 먼지가 잔뜩 쌓이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귀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친구에게 이제 맡긴 물건을 돌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요. 다행히 친구는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참을 창고를 뒤지고 뒤져 결국 먼지가 자욱한 물건을 꺼내 왔습니다. 귀인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물건인데 그렇게나 소홀히 다루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귀인은 결국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 물건을 되찾아서는 비단 보자기에 곱게 싸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귀인이 사는 이웃 동네에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귀인이 사람들의 사랑을 잔뜩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듣자하니 그 귀인에게 보물이 든 상자 하나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보기만 해도 치유가 되고 튼튼해져서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돌아가고 그 귀인에 대해서 온갖 찬사를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친구는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귀인의 집에 달음질쳐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들은 소문을 친구에게 말하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귀인은 사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친구는 그 물건을 한 번 보기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귀인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것을 펼쳐 보였습니다. 그건 바로 그 귀인이 친구에게 맡긴 상자였습니다.

- 아니, 이건 자네가 나에게 맡긴 그 상자가 아닌가?
- 그렇네.
- 그럼 그 보물이라는 것이 그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겐가?
- 그렇지.

친구는 이마를 감쌌습니다.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지른 것인지 그때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물건은 원 주인에게 돌아갔고 다시는 자신에게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받은 ‘신앙’이라는 상자를 열어보기나 하는걸까요?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제대로 쓰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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