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완성될 교회

그리스도 중심적
교회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중심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에서 밀려난 교회는 반드시 엇나가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자리에는 전혀 엉뚱한 것들이 끼어들게 마련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간들이 끼어들지요. 한계가 있고 나약하고 때로는 악하기까지 한 인간들이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절대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다만 여기에서 한가지를 더 덧붙여야 할 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말이 배타성의 근거로 작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는 인간을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인격적인 분, 선하고 진실하고 성실한 바로 그 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이상한 사고로 바꿔서 마치 무슨 이데올로기의 하나인 양 설명하는 경향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모범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어느 특정 종교의 배타성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복음적
교회는 성경적,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가르침과 활동의 근거는 성경과 복음에서 기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거나 가르치지 않는 전혀 엉뚱한 것을 들고 오는 이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신다는 마지막 순간을 들고 와서 겁을 주며 가르치려는 이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고, 그분의 섭리입니다. 하느님은 영원 가운데 우리가 머물 곳을 마련하셨고 각자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스스로의 선행과 악행으로 합당한 곳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정을 돕기 위해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거룩한 약속이 모두 성경 안에, 복음서 안에 담겨 있으니 우리는 성경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성찬례적
교회를 생각하면서 미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하시면서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제사 행위에 당신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더해서 전혀 새로운 예식, 피흘림이 없는 예식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지니고 있는 보물과도 같은 ‘미사 성제, 성찬례’입니다. 교회는 이 미사를 통해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자녀들을 온전히 하나로 일치 시킵니다. 여러 이웃 교회들이 이 미사를 공격하려고 하겠지만 그들의 시도는 모두 무산될 것입니다. 미사야말로 우리 교회 공동체를 온전히 하나의 몸으로 만들어 주는 훌륭한 수단입니다. 과거 모든 성인들은 개신교에서 내세우는 성인이건 가톨릭에서 내세우는 성인이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미사’의 신비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미사를 와해 시키려는 모든 교회는 그 진실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공동체적
혼자 이루는 구원이란 없습니다. 교회의 구원은 공동체적입니다. 단순히 구원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은 공동체적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기적인 사람들의 양성소가 아닙니다. 홀로 열심히 기도해서 구원을 얻겠다는 생각, 또는 자신의 가족만, 혹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단체만을 생각하는 것은 전혀 교회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교회의 특징은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야 하며 우리는 서로 도와가며 함께 걸어나가야 합니다.

선교적
모든 이를 초대하지 않는 교회, 더 이상 자라지 않으려 하는 나무는 사실 죽은 나무입니다. 교회의 특징은 ‘선교적’이어야 합니다. 자신이 진정 좋은 것을 가지고 있고 나눌수록 그 가치가 커지는데 그것을 나누지 않으려 한다면 가지고 있는 것이 실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게 되는 것이고 전혀 엉뚱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전례를 멋드러지게 꾸미기 위한 것, 혹은 성경적 지식을 머리에 채우는 수준이 아닙니다. 교회는 진정한 구원의 기쁨,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절로 이웃과 나누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반드시 ‘선교적’이어야 합니다.

복음화적
복음화라는 말은 ‘성경적’이라는 말과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복음을 통해서 복음화가 이루어지지만 복음이라는 것은 명료하게 쓰여있는 예수님의 말과 행적을 의미하고 복음화는 그 말과 행적은 이 시대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복음’이라는 죽어버린 글만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화를 위해서는 지금 머무는 곳에서 씨앗이 되어 심겨져야 하고 죽어야 합니다. 자신을 죽이지 않는 씨앗은 자신의 생명은 보존할 지 몰라도 결국 나머지를 굶주림에 죽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머무는 가정에서 복음화의 정신으로 살아야 하고, 직장과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화라는 것을 ‘교회의 껍데기’를 드러내는 것과 착각하지 마십시오. 복음화는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가는 것이지 예수님 코스프레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복음화적이어야 합니다.

모든 이가 받아들여지는…
마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는 그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선택으로 벗어나려는 이는 어쩔 수 없어도 어떻게든 교회의 일원이 되려는 이를 배제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이 말이 모든 이가 특수한 직책에 합당하다는 말도 아닙니다. 교회는 분별력이 있어야 하고 사제는 사제로, 수도자는 수도자로, 교리교사는 교리교사로, 평신도는 평신도로, 저마다의 특별한 카리스마대로 합당하게 선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는 모든 이는 교회의 손길에서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모든 이가 받아들여지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