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움을 말한다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의로움을 살아갈 때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선교에 대해서 말한다고 선교사가 되는 게 아닙니다. 선교지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그들 안에 하느님을 전할 때에 선교사가 되는 것이지요. 이를 모르니 사람들은 눈에 드러나는 것을 찾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지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섣불리 판단하고 말아 버립니다. 교황님의 말이 힘있는 이유는 당신이 직접 말씀하신 것을 살아오셨고 살아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고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가르침이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할 때에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정치 현안에 대해서 말을 하고 숨겨진 진실을 밝혀서 SNS상에 배포하는 것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내가 하루에 마주하는 실제적인 사람들, 가족들,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내 사랑을 드러낼 때에 내가 진정 ‘의롭고 사랑 가득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일에 사람들의 동조를 끌어내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움직임이 우리의 평소 생활에서도 반영되고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그분이 자신의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보물을 남에게도 전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진정한 진리와 정의이신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살아가고 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말이지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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