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에 세상에 기준점이 없다면 모두는 저마다의 기준점을 지니고 있을 것이고 그 누구도 서로에 대해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즉, 가치판단의 ‘옳고 그름’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 부분에 있어서 선교사로서 많이 깨어지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 가지는 다양성에 대한 색다른 체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늘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실은 상당수 우리가 자라온 문화에서 비롯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한국에서나 밥상 예절과 젓가락 예절이 있을 뿐, 남미에서는 젓가락을 쓸 줄도 모르는 거지요. 그리고 남미에서는 전혀 다른 예절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굳건한 기준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 하고 악을 저지르면 안되지요. 그리고 남이 싫어하는 행동은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준점을 통해서 우리는 단순히 각자의 공간을 형성하는 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한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 결국 하나로 묶이는 이들이 되는 것이지요.
헌데 이 기준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누가 말하듯이 자연히 발생한 기준들, 즉 단순히 우리끼리 부딪히다가 찾아낸 기준일 뿐인 걸까요? 하지만 때로는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 반의 모두가 컨닝을 하면 컨닝이 하나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모두들 그건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요. 즉 우리가 지닌 기준은 사회적으로 약속된 것이기보다 그 이전에 우리 내부에 방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언제나 진실과 정의, 선을 위한 방향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가장 근원적인 기준점을 바탕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져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준점들이 나타나 이를 자꾸 흐리지요. 그 새로운 기준점들은 바로 ‘이기심’의 발로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원래의 핵심 줄기를 상하게 하기 시작하면서 기준점이 흐트러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기준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실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니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내재된 그 ‘양심’이라는 기준점 외에도 전혀 색다른 기준점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시지요.
인간은 자신의 능력껏 기준점을 보호해 왔습니다. 그것이 법률화 된 기준점, 즉 율법이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기준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즉 ‘사랑’이지요.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이전의 기준점의 필요를 뛰어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매주 주일미사를 꼬박꼬박 나가면서도 누군가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사람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일 미사를 어쩔 수 없이 거르는 사람이 보다 기준점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말이 되지요. 안식일 법이 있지만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기 위해서는 안식일 법을 어기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완성한 것이었지요.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세상 안에 고착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굳건히 믿는 것들 중에서는 사실 전혀 옳지 않은데 나의 ‘욕구’에 의해서 옳다고 고수하고 있는 것들이 있지요. 길을 따라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진정한 길은 ‘예수님’이시고 그분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선교사로서 많이 깨어지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 가지는 다양성에 대한 색다른 체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늘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실은 상당수 우리가 자라온 문화에서 비롯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한국에서나 밥상 예절과 젓가락 예절이 있을 뿐, 남미에서는 젓가락을 쓸 줄도 모르는 거지요. 그리고 남미에서는 전혀 다른 예절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굳건한 기준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 하고 악을 저지르면 안되지요. 그리고 남이 싫어하는 행동은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준점을 통해서 우리는 단순히 각자의 공간을 형성하는 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한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 결국 하나로 묶이는 이들이 되는 것이지요.
헌데 이 기준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누가 말하듯이 자연히 발생한 기준들, 즉 단순히 우리끼리 부딪히다가 찾아낸 기준일 뿐인 걸까요? 하지만 때로는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 반의 모두가 컨닝을 하면 컨닝이 하나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모두들 그건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요. 즉 우리가 지닌 기준은 사회적으로 약속된 것이기보다 그 이전에 우리 내부에 방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언제나 진실과 정의, 선을 위한 방향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가장 근원적인 기준점을 바탕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져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준점들이 나타나 이를 자꾸 흐리지요. 그 새로운 기준점들은 바로 ‘이기심’의 발로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원래의 핵심 줄기를 상하게 하기 시작하면서 기준점이 흐트러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기준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실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니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내재된 그 ‘양심’이라는 기준점 외에도 전혀 색다른 기준점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시지요.
인간은 자신의 능력껏 기준점을 보호해 왔습니다. 그것이 법률화 된 기준점, 즉 율법이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기준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즉 ‘사랑’이지요.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이전의 기준점의 필요를 뛰어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매주 주일미사를 꼬박꼬박 나가면서도 누군가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사람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일 미사를 어쩔 수 없이 거르는 사람이 보다 기준점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말이 되지요. 안식일 법이 있지만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기 위해서는 안식일 법을 어기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완성한 것이었지요.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세상 안에 고착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굳건히 믿는 것들 중에서는 사실 전혀 옳지 않은데 나의 ‘욕구’에 의해서 옳다고 고수하고 있는 것들이 있지요. 길을 따라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진정한 길은 ‘예수님’이시고 그분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댓글
예수님 곧 사랑이신 기준점을 갖고 제 삶의 오늘 내일 그리고 제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