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기초신앙 다지기
우리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헌데 과연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혼인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는 행동의 기초에는 무엇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요?
1) 원하기 때문에
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는 ‘원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합니다.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대부모가 되고 싶어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싶어서 교회의 혼인을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단순히 혼인 행위를 완료하고 문서를 받아 든다고 해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보다 근본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보다 근본적인 방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즉 하느님을 진정으로 원하고 그분에게 다가가고 싶은가 아닌가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2) 하느님을 아는가?
헌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느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과연 하느님은 누구실까요?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저를 ‘요셉 신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제 경력으로 아는 사람도 있을 테고, 또 친척 중의 일부는 저의 어린 시절을 잘 알고 있겠지요. 하지만 진정으로 누군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에 대해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그와 내적으로 긴밀히 일치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친구를 많이 가질 수 있지만 진정으로 내면을 나누는 친구는 많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 하찮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술에 대해서는 잘 알고, 텔레비전 프로와 인터넷 기사 거리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하느님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좋은 분’ 정도가 그들이 알고 있는 전부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하느님을 거의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지극히 편파적인 지식일 뿐 하느님 본인을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아는 방법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기 위해서 그분에 대한 책을 읽을 수 있고 그분에 대한 연구와 조사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그분을 참으로 알아가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보지 못한 것, 듣지 못한 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바로 무언가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고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을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셔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예수님은 오셔서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뒤를 이어서 교회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을 보게 하여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인 그른 일인지 분간하게 하고, 다리를 절어 올바로 걷지 못하는 이들을 낫게 하여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삶인지 가르쳐 주고,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하여 나병과 같은 죄 때문에 사회에서 격리되고 자기 자신 안에만 숨어 있는 이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고, 듣지 못하는 이들의 귀를 뚫어 하느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듣게 하고, 죽은 이들을 되살려 영적으로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이들에게 다시 살심장을 주게 하고 일어나 살아가게 하는 것과 같은 활동을 하고 있지요.
하느님은 예수님에게 당신을 드러내셨고,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날 같은 일을 하면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게 하지요. 여러분들이 혼인 성사를 하기를 원하게 된 이유도 바로 교회가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곳곳마다 본당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기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신앙인들이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요.
4) 하느님에 대한 오해
그렇다면 이제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배워 보도록 합시다.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 것일까요? 이를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 아닌 것들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고 빼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이들은 하느님을 단순히 무서운 심판관, 숙제 검사하는 선생님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킬 것이 가득하고 그것을 다 지키지 못해서 언제나 우리를 미워하고 벌을 주려는 분으로만 생각하지요. 신앙인들이 성사적인 행위를 채우려는 것도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비롯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벌이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성사적인 행위를 채우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행위 속에는 그분을 향한 참된 사랑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두 연인을 떠올려 보십시오. 서로가 서로를 위한 의무를 채우는 게 아닙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배우자가 될 여성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기호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그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상대의 행복과 미소를 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해서 그분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하느님과 ‘계약 관계’ 안에서 그분이 요구하시는 최소한의 것이나 하고 나머지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바로 하느님에 대한 관점에서 오류가 생기는 것입니다.
세례, 성체(첫영성체), 견진, 혼인의 성사 행위를 마치고 나면 마치 적어도 천국에 가는 데에 하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관념을 뽑아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버스표만 끊어 두면 원하는 곳에 언제라도 버스만 타면 갈 수 있는 그런 식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친구가 되어야 하고 우정을 쌓아야 하는 것이지 하느님 버스를 타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은 어떤 종류의 사물이 아니라 우리와 마주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귀한 분이십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로 하느님께서 가장 완전한 분으로서 우리에게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선물하신 것이지요.
5) 죄와 의로움
헌데 우리 인간은 그런 분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법적 행위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즉, 주일을 꼬박꼬박 지키고 교회가 정하는 모든 규정을 엄밀하게 지키는 것이 의로움이 아니라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하느님을 향한 방향이 있을 때에 의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혼인 행위를 교회 안에서 교회법적으로 맺는다고 부부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진실로 하느님을 믿고 서로를 향해서 헌신해야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부부가 교회혼을 하고 주일 미사를 빠지지 않는다고 의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서로를 위해서 헌신하고 양보하고 사랑할 때에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는 이러한 의로움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하느님마저도 우리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거룩하고 존귀한 분이 아니라 일종의 딱딱하게 굳어있는 ‘대상’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자동 판매기처럼 주일미사라는 동전을 넣으면 나에게 축복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는 딱딱하고 고정된 분으로 생각하게 되었지요.
6) 하느님
하느님은 마치 엄마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다가가서 매달리고 칭얼대고 하루 중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잘못했다고 비는 어린 아이를 용서하시는 분이시고 또 아이가 위험한 곳에 접어들 때에는 위험하다고 알려주시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보살피시는 분이십니다. 뉘우치는 죄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다시 끌어안아 주시고 용서하시는 분,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고, 그 날 필요한 생명을 선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하느님을 일상적으로 무시하고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7)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사실 문제는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늘 한결같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잊고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는 ‘이기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참으로 소중한 관계를 너무나도 소홀히 해 왔고, 그 시간이 너무나 길어져 이제는 아예 하느님에 대한 감각 자체가 없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8) 다시 하느님께로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하느님에게로 돌리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 이 하나의 목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에게 되돌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에게 감사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해서 배우고 그분이 허락하신 은총의 일들인 성사를 집전하고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교회혼을 하려는 이유도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에게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9) 꾸준함
하지만 이것이 일회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이러한 돌이킴은 한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혼인 생활이 한 번의 약속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꾸준히 약속을 하고 지켜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꾸준함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거듭 우리의 방향을 살피고 하느님을 향하려는 결심을 다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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