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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강좌 - 3일 성(性)


성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노력해 봅시다.

먼저 성을 떠올리면 가장 손쉽게 떠오르는 것이 ‘성관계’입니다. 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가장 우선적으로는 섹스를 떠올리는 것이 보통의 우리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정말 남자와 여자의 성이라는 것이 섹스 뿐인 것일까요?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를 차이를 두고 만드셨습니다. 이는 차별이 아니라 차이인 셈이지요. 그리고 이 차이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만드셨고 서로를 완성시키게 하셨습니다. 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신체 기관의 차이가 아니라 두 인격의 만남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성은 강합니다. 그리고 집중력이 강하지요. 어떤 일에 착수하면 그것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그것을 마치고 나면 다른 일에 시선을 집중 시킵니다. 고대로부터 남성은 사냥을 해 왔고 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능력, 그리고 자신의 건장한 신체로 그 일을 향해 몰두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반면 여성은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일들을 잘 기억하고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신경쓸 수 있지요. 여성에게는 잉태하는 태가 있고, 젖을 먹이는 가슴이 있어서 그 특유의 부드러움과 더불어 아이들을 잘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이런 기초적인 두 가지 특질을 바탕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본질적으로 다른 두 대상이 한 곳으로 어우러지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엔진의 두 부품이 아무리 잘 맞물려 있다 하더라도 ‘윤활유’가 꼭 필요합니다. 헬멧이 아무리 나에게 꼭 들어 맞아도 그 안에 ‘완충제’가 필요합니다. 벽돌을 아무리 정교하게 쌓는다 하더라도 ‘시멘트’가 필요하지요. 사랑은 두 서로 다른 인격적 존재 사이에서 때로는 윤활유의 역할을 때로는 완충제의 역할을 때로는 시멘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남녀가 처음 사랑에 빠질 때에는 상대의 단점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이 그 모든 것을 극복하게 도와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랑이 없는 관계를 실제로 체험합니다. 바로 은행에 가서 은행원과 가지는 관계이고, 또 시장에 가서 상인과 갖는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상품을 제공하고 우리는 그 값을 치르면 그 관계는 성사되고 끝나게 됩니다. 그들과는 별다른 기타 요소가 필요하지 않지요. 우리가 원하는 목적이 있고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부는 다릅니다. 부부는 두 서로 완전히 다른 인격이 마치 하나의 몸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는 ‘사랑’이 필수적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그 어떤 시련과 역경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완벽한 궁합이라도 결국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헌데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이를 향한 ‘사랑’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애정, 관심, 헌신과 같은 표현이 있지요. 문제는 그것이 한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 안에는 마치 작은 항아리와 같은 그릇이 있다고 상상해 볼 수 있는데 그 안에 포함될 수 있는 사랑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지니고 서로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랑은 일종의 한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고 그 한계를 벗어나면, 즉 항아리 안의 사랑이 메마르고 나면 더는 상대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마치 그 항아리에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과도 같지요. 그 수도꼭지는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 수도꼭지의 수원은 바로 하느님인 셈이지요.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다시 사랑을 되새기고 다시 하느님에게서 사랑을 공급받아 생활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항아리는 메마르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이라는 것은 가게에서 살 수 있는 상품과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늘 되새기고 키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지요.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사랑을 시작하고 나면 그 사랑을 키워 나갈수도 죽여 버릴수도 있는 셈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결혼을 통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시작’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배우자를 향한 그 사랑을 알콜에 쏟아 부을수도 있고, 탐욕에 선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배우자를 향해서 날마다, 순간 순간마다 새롭게 헌신해야 합니다. 내 눈앞에 있는 배우자는 또다른 하나의 우주에 비교할 수 있으니까요. 늘 새로운 것을 탐구하려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에 대해서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성관계라는 것, 섹스라는 것은 이러한 성의 특질이 잘 어우러져 맺어지게 되는 최고의 결실과도 같은 것이지요. 즉 사랑의 최고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특별한 사랑의 행위는 오직 부부에게 유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에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와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녀출산이지요. 성행위는 자녀 출산을 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남성은 성관계 중에 여성의 깊숙한 곳에 들어가 씨를 뿌리게 되어 있고, 여성은 남성의 성기를 받아들여 그 씨앗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가장 온전한 쾌락이 선물로 주어지지요.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의 탐욕으로 이 성관계를 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온전한 사랑의 행위 가운데 오직 ‘쾌락’만을 향해 달음질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파괴되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릇된 관계는 자연히 주변의 관계를 파괴 시킵니다. 또 원치 않은 임신은 관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생명을 파괴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지요. 즉, 낙태를 하는 것입니다. 생식 능력을 지닌 두 어른이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서 자유로운 동의로 모여 즐기고는 그 결과물이 생기자 두려움에 휩싸여 마치 그 새로운 무죄한 생명에게 모든 원흉이 있다는 듯이 그 아이를 죽여 버리고 마는 참으로 심각한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시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함부로 대할 때에 당연히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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