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소경에게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입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래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기도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피상적인 요구만을 쏟아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이 필요하답니다. 헌데 왜 필요할까요? 그 돈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정말 나에게 일용할 양식이 부족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 내가 정한 부동산을 구입하고 돈을 막대하게 벌어들이는 데에 지장이 있어서 일정량의 돈이 더 필요한 것일까요? 대학에 들어가고 싶다고 합니다. 정말 나에게는 지금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할 만한 합당한 능력이 갖춰져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 실력이 안되는데 기적의 힘을 빌어 운수 좋게 들어가 보려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 그리고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당신에게 들어높이는 기도는 무엇이든 다 듣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하나로 모아져야 합니다. 즉, 기도하되 무엇이든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복음 구절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과연 무엇을 원할까요? 근본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원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전능에 힘입어 불가능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자녀가 사탕을 달라고 한다고 해서 1년 내내 사탕을 주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녀를 망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사탕을 달라고 떼를 쓰더라도 ‘인내’아 ‘절제’를 가르치려고 애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온갖 것들에 대해서 탐욕을 부리면서 그러한 것들을 내어 놓으라고 하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조치를 취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에게 바랄 수 있는 것, 그 가운데 최고봉은 바로 그분의 성령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청할 때마다 충분히 그 성령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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