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요한 복음 13장

13장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이 맡게 된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는 당연히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유다를 향한 사랑은 어느 순간 멈춰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유다의 고유한 자유의지의 선택이었던 것이지요. 유다는 이미 일찍부터 도둑질을 하고 있었고 예수님에 대한 일말의 존경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악마는 그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팔아넣을 생각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준비하고 유혹에 대항할 힘을 갖춘다면 악마는 우리에게 아무런 능력도 갖지 못하게 됩니다.

발씻음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앞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시작하십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 행동을 야기하도록 하는 바탕이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하느님께 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당신의 사랑을 완성하시고 싶어하시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봉사’ 였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왕직, 즉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봉사의 행위였고 그 대표격이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었지요. 물론 제자들 가운데 수장인 베드로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지금은 깨닫지 못하지만 나중에 깨닫게 되리라고 말씀을 하시지요. 때로 우리가 봉사를 받을 때에 우리는 그 순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볼 때에 자녀로서의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우리가 봉사의 자리에 나서야 할 때인 것입니다. 때가 이르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신앙 안에서 봉사를 하게 되는 모든 이들은 저마다 나름의 봉사를 받은 셈입니다. 누군가의 봉사가 없다면 자신이 신앙을 갖게 될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봉사의 직분으로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봉사라는 것은 마치 피를 전달하는 핏줄과도 같은 것이지요. 봉사의 근본에는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사를 받지 못하면 나중에 받을 몫도 없다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핏줄로 연결되지 않으면 나의 지체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유다의 배반
그런 봉사 가운데에도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유다를 씻어주셨지요. 당신의 봉사 가운데 당신을 배반할 자를 제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열심히 정성을 담아 씻어 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다는 이 애정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순간 마저도 자신의 어두움을 내버리지 않고 간직합니다. 우리는 유다가 단순히 도구로 쓰인 것이 아닌지, 그래서 그에게는 죄가 없는 것이 아닌지 궁금해 합니다. 아닙니다. 유다는 모든 순간에 예수님의 사랑을 남김없이 받았고 그 모든 순간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이미 영혼이 깨끗한 상태라 마지막 이 봉사의 가르침으로 온전히 깨끗하게 될 수 있었지만 유다만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성찬례에 참례하는 이들 가운데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미소한 죄에 머물러 있을 때에 식탁의 봉사, 즉 성찬례를 얻으면 그 미소한 잘못이 정화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반대로 자신의 의지적인 강한 어두움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성찬례가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훗날 더한 심판의 원인이 되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에게 예물을 드리려 할 때 반목하는 형제와 먼저 화해를 하라는 복음의 구절을 상기시켜 볼 수 있습니다.

본을 받아라
우리가 실천하는 신앙은 단순히 이론으로 전해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아름다운 행위를 보고 감화를 받아서 본격적인 신앙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누군가의 모범이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설령 그 누구도 자신의 신앙의 선배로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최종 모범으로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스승님은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씻으시고 씻으실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이시요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범 앞에서 우리는 같은 일을 우리가 만나는 이들에게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신앙을 얻게 된 이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배반자에 대한 사랑
이어 예수님은 유다에 대한 예언과 더불어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에 누구가 나를 해코지할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을 안다면 우리로서는 그의 음모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그를 수치스럽게 하여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유다에게 위협을 가해 그를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기회를 주시고 또다시 기회를 주셔서 유다가 마지막까지 뉘우칠 기회를 거듭 내어 놓으십니다. 하지만 유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마음을 굳히고 말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최종적으로 빵을 건네고 그 빵을 받는 순간 결국 유다의 결심은 확고하게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물론 우리로서는 이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연구 결과는 있어도 영적인 면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직 어떻게 움직이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내면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생각들을 모두 알고 계셨고 분별하고 계셨습니다. 결국 유다는 하려는 일을 하러 나가고 그 시기는 밤,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으로서의 어두운 시간이 아니라 영적으로 악이 설쳐대기 시작하는 때가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영광의 시작
이제 모든 어두움이 사라지고 예수님의 공동체는 다시 순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빠진 그 열한명의 제자들과 모여 앉아 본격적인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 아직 수난과 죽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유다의 그 결심으로 인해서 이미 일은 시작되었고 완료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둠의 세력은 한 번 작정한 것을 그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동전을 들고 그것을 던질 생각을 하기 시작할 때에 비록 아직 동작을 취하지 않더라도 그 동전은 이미 던져진 것이나 다음이 없습니다. 내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말이지요. 그렇게 수난과 죽음, 즉 영광에 이르는 과정은 시작이 되었고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이 예수를 통해서 진정으로 구원을 얻고 다시 하느님을 하느님 본래의 자리에 두고 그분을 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는 미스터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다가올 운명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복음 구절을 읽는 우리로서는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새로운 계명
이어 예수님은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순수한 계명을 주시는 것이고, 여전히 그 계명은 우리 각자에게 새로운 계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옛 죄의 율법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고 예수님을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새로운 계명인 셈입니다. 우리는 아직 예수님처럼 사랑할 줄 모르고 많은 경우에 우리 식대로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식의 사랑이란 한 번 건네주고 다시 받는 사랑입니다. ‘거래’라는 형식의 사랑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순수한 내어줌의 사랑입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랑이지요. 그래서 이 사랑은 여전히 새로운 계명이고 앞으로도 새로운 계명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의 배반
예수님은 제자들의 영적 성장 수준을 다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게 되는 곳이란 지상의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영광을 말씀하고 있었고 거기에 이르는 ‘수난과 죽음’의 과정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분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고 심지어 목숨까지 내어 바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성장 상태를 알고 계셨고 그가 당신을 배반하게 될 것을 예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때가 되어 이 일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