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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앞에 둔 예수님



예수님은 인간의 비극을 앞에 두고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지만 의외로 냉정하게 비춰지는 모습도 적잖이 보여지곤 합니다. 타인의 불운을 앞에 두고서도 그렇고 또 심지어는 본인에게 다가온 슬픈 운명 앞에서도 그렇습니다.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루카 13,1-5)

예수께서는 그 여자들을 돌아보시며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 (루카 23,28)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 자신의 방향성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그러한 사건들에 집중해서 정작 우리 본인들이 가고 있는 길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생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고,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현실입니다. 누군가는 급작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암에 걸리고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해도 그가 몇 날 며칠 몇 시에 세상을 떠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갑작스러운 사건이 됩니다.

타인의 죽음을 앞에 두고서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알려주고 싶어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의 방향성을 점검하고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길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있는 사람은 설령 죽음이 다가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을 허락하신다면, 마찬가지로 당신의 자녀에게 생명도 선물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23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2마카 7,22)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비극 앞에서 당황하거나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이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로 마음을 모은 사람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직분을 수행하든 아름다운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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