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껍데기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라는 타이틀은 세상에서는 참으로 곱상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세상이 가톨릭에 대해서 가지는 이미지를 참으로 잘 표현해 냅니다. 머리수건을 쓴 수녀, 성경책을 옆에 끼고 있는 사제, 묵주를 쥐고 있는 신앙인의 모습과 같은 것이지요.
물론 최근에는 이런 모습들이 점점 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전에는 거룩하게 여겨 건드리지 않던 것들을 이제는 슬슬 호기심의 영역으로 꺼내어 놓고 있습니다. 대중매체의 발전과 인터넷의 영향으로 이제는 그닥 비밀스러울 것이 없어지게 된 셈이랄까요? 마땅히 깨어져야 할 것이 깨어지는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반면 마땅히 간직하고 있어야 할 소중한 가치들도 점점 깨어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자녀들이 어른이 되어가면서 아버지가 더는 수퍼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필요한 이해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상실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지요. 비슷한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정에 대해서 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지니고 파악하게 되면서 막연한 환상은 깨어지고 있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아예 모든 존경을 파괴하려는 모습도 심심찮게 드러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는 ‘신비의 영역’이 존재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인간적으로 나약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나약함 가운데 맡겨진 하느님의 거룩한 사명이 있고 거룩한 권위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인간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마치 곤충 안에 생명이 있는데 그것을 산산 조각 내어서 현미경으로 관찰한 후에 마치 그 곤충을 다 파악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이미 그 곤충은 죽어 버린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을 관찰한 셈이지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비록 사제나 수도자나 교회에 몸담고 있는 수많은 신앙인들이 그 자체로는 나약함을 지니고 있고 심지어는 엇나갈 때도 있지만 여전히 교회는 그 전체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분별은 필요한 일이지만 심판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함부로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신앙의 외적 껍데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신앙의 본질을 상실해서도 안됩니다. 비록 불완전하고 못난 우리들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명을 맡겨 수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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