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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익숙함으로 가는 곳



저마다 자신에게 익숙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술꾼은 흥청대는 술자리가 익숙하고, 담배를 태우는 사람은 서로 모여 한대씩 물고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장면이 익숙하고, 수다를 즐기는 사람은 카페나 식당에 모여서 이런 저런 잡담을 주고받는 것이 익숙합니다.

자신이 즐기는 것이 남에게도 좋을 리가 없고, 자신이 싫다고 해서 남에게도 싫은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것에 익숙해져 온 셈이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쉽사리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는 것이 쉽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신앙인인 이유는 하느님과 머무는 것을 즐기고 그분이 명하는 사랑을 나누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수료했다고 해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지요. 물론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교회의 일원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여지지만 그것은 첫 단추를 꿰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시작한 길을 걸어 나가야 하고 익숙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랑에 익숙해지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세상의 질서를 배워 오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뿌리깊은 ‘이기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인간적인 의미의 사랑도 이 이기성을 바탕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헌데 하느님이 가르치는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을 죽이지 않고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것입니다. 그래서 익숙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곳, 서로가 상대의 필요를 살피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무작정 들어간다고 해서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서서히 익숙해져가야 하는 곳이 되는 것이고, 바로 지금의 우리가 머무는 이 세상은 그 사랑을 훈련하기 위해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을 받는 훈련소와 같은 셈이지요. 지금 만나는 가족들은 나에게 필요한 덕목을 훈련하기 위해서 만나게 되는 가족들인 셈입니다. 그리고 내가 일상 안에서 접하는 이웃들과 사건들도 저마다 일종의 훈련기회인 셈이지요. 우리는 그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서 끊임없이 마음을 돌리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훈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세상은 단순한 훈련의 장소가 아니라 ‘선업을 쌓는 곳’이기도 합니다. 즉, 가장 기초적인 사랑의 양성이 이루어지고나면 내가 이미 아는 바를 실천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타인을 열심히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원의 나라에 필요한 건축 재료들을 마련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수준에서 이를 이루어 나갑니다. 물론 아예 관심도 없는 이들이 있고, 악한 짓이나 저지르지 않으면 다행인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밀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는 곳이니까요.

천국에 익숙해져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어 갈 때에 전혀 색다른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술’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다가 어른이 되어 술자리의 즐거움을 알게 되는 것처럼, 역으로 우리는 하늘 나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다가 사랑에 익숙해져 가면서 하늘나라의 숨겨진 즐거움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일단 그 즐거움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다른 것들을 하찮게 여기게 되기 시작하지요.

아, 잊지 마십시오. 하늘나라의 참된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의 고통’은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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