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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14장

14장
순수한 믿음
빛은 맑은 공기를 투과하면 그대로 내려 옵니다. 다시 말해 산란해지는 일이 없지요. 하지만 공기 중에 먼지가 많이 끼어 있거나 구름이나 안개가 있으면 그대로 내려오지 못하고 산란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니 우리가 순수한 믿음을 지니고 있으면 하느님의 빛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에 다른 신념들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하느님의 영광의 빛은 우리에게 그대로 다가오지 못하고 이리저리 흐트러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순수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런 저런 것들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든 꾸미고 다듬어서 인간의 굴레를 씌우려는 시도들이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주님은 가서 우리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고 다시 와서 당신이 계신 곳에 우리를 함께 있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가시는 길,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길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역시나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이 어딘가로 여행이라도 가시는 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다시 진리를 밝혀 주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분명한 증언을 해 주고 계시지요. 당신의 삶의 여정, 당신의 생의 여정을 따라와야 당신이 가시는 곳에 우리도 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자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지요. 따라서 그분을 통해서 아버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는 구원하려는 분이시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분이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미 아버지를 직접 맞대면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제자들의 몰이해는 계속됩니다. 필립보는 아버지를 이미 보았다고 하는 예수님 앞에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필립보는 아직 육신의 눈에 힘입어 무언가를 보게 해 달라고 졸라대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우리의 신체에 달린 두 눈으로 본다는 의미가 아니지요.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하는 의미는 그를 한 번 흘긋 바라본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우리는 외적으로 치장을 잔뜩하고 나가는 누이를 보면서 그의 외적 화장 너머에 존재하는 그 누이의 존재, 즉 집안에서 어머니를 어떻게 돕고, 아버지에게 어떻게 맞대응을 하고 동생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이의 외적 모습, 잠시 치장을 해서 마주하는 그 곱상한 모습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누이를 모르고, 식구들은 누이를 아는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만나 예수님을 알아 왔으면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아야 하건만, 여전히 제자들은 깨달음과 믿음이 많이 부족한 셈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알려 주십니다. 즉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으라고 가르쳐 주시지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은 예수님의 개인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안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직접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내면의 관계는 우리에게도 확장이 됩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고 그분이 하는 말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즉시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지상에 머물러 계시는 동안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도 충분히 해 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까지 하십니다. 물론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반복해서 외워대면서 누군가에게 복수하게 해 달라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 예수님의 이름에 합당한 일을 청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선과 진리와 정의와 사랑에 합당한 일을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마땅히 당신의 계명을 지키게 되지요.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사람은 당신의 계명을 지키면서 그분에게 합당한 것을 청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른 보호자
이어 예수님은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다른 이름으로 ‘진리의 영’이라고도 부르고 계시지요. 왜냐하면 성령은 온전한 진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진리란 객관적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 진실한 방향성을 의미합니다. 악마도 사실적인 면에서 진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완전히 진리에서 멀어져 있지요. 즉, 어느 아내가 남편 앞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요모조모 따지고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의도는 남편을 존중하지 않고 이기려는 것이면 그 행위 자체는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셈입니다.

돌아옴
예수님은 다시 돌아오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엄마와 아빠, 즉 보호자가 없는 존재는 고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우리와 똑같이 살아있는 존재로 계시지 않는 동안 성령을 약속하실 뿐 아니라 반드시 돌아오신다는 약속도 주십니다. 그리고 이 일은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으니 우리는 매일의 미사 안에서 예수님과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나약한 믿음이 그분을 느끼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을 뿐이지요.

감추어진 분
세상에는 감추어지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은 모든 것을 외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성과로, 통계로, 숫자로, 지표로 살피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죽은 존재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지 않으시며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앎과 믿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준비작업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먼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말을 무시한다면 그는 거짓 위선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지킬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분의 말은 공허하게 들릴 뿐입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의 말을 더 들으려고 하지 예수님께서 하신 참된 말씀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나약하고 낡아빠진 미사여구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
진정한 평화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이 일어날 때에 그것이 왜 일어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수 있습니다. 비록 당신의 몸은 수난 당하고 심지어는 죽음을 맞이 하겠지만 그분은 이 일이 왜 일어나는지 알기 때문에 평화를 지닐 수 있고 또 제자들에게도 그 평화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평화는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잔잔하고 고요한 마음에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잔잔하고 고요한 마음 주변에는 실제적으로 수많은 일들이 늘 일어나고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폭풍우 속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이 드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변의 사건과 사람들에 너무나도 쉽게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기쁨
제자들은 예수님이 더욱 더 강조해서 당신의 떠나감을 이야기하자 슬퍼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곳에는 당신의 아버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생활의 마감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 맞지만 그 뒤에 다가올 기쁨에 희망을 두고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 땅에서 수난 당하고 천시 당하고 심지어는 죽음까지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에 다가올 것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우두머리는 세상 안에 주어진 권한으로 예수님을 다루겠지만 그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시작이시요 마침이신 분이기에 세상의 우두머리, 늘 한계가 있는 그는 예수님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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