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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도 범어성당에서 한 고해성사 특강 내용



9일기도 네째날 특강

주제 : 고해성사
강사 : 마진우 요셉 신부님

성사보기를 마다하는 어른들 - 엉덩이가 곪은 어린아이의 비유

사람들은 왜 고해성사 보기를 꺼려할까요? 다음 이야기에서 그 실마리를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한 꼬마아이가 엉덩이에 상처가 났습니다.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내다가 그만 상처가 곪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리만치 아픈데 겉으로 보기엔 조그만 뾰루지로 보일 뿐입니다. 아이는 나가서 마음껏 놀지도 못하고 조심조심 다니다가 엄마를 만나자 투정을 부립니다.

‘엄마~ 궁디 아파 죽겠다.’

‘와? 함 보자.’

아이는 엉덩이를 조심조심 까서 엄마에게 상처를 보여줍니다.

‘별거 없는데, 이 뾰루지 때문에 아픈기가?’

엄마는 무심히 상처를 만져보려고 손을 뻗습니다. 순간 아이가 기겁을 합니다.

‘안된다 안된다!!!! (방방 뛰면서)아프다아~’

‘야가 와이카노? 함 만지봐야 알 꺼 아이가!!! 일로 온나!!!’

‘안된다!!! 아프다!!!!’

엄마는 대충 상태가 어떤지 짐작을 합니다. 하지만 상처를 깊숙이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니 그거 그대로 놔두마 우예 되는지 아나? 궁디가 산만하이 붓는기라. 그라고도 계속 놔두마 니 지금보다 더 아프데이...'

아프다며 만지지 말라고 떼를 쓰던 아이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게 된 것 같은 눈치입니다. 아이는 그제서야 엄마에게 다가가 상처를 내보입니다.

‘엄마 살살해래이~ 진짜 아프데이~’

‘알았다.’

엄마는 겨우 아이를 구슬러 상처를 살살 만져본 뒤 안에 고름이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순식간에 상처 양쪽을 눌러서 고름을 짜내 버립니다.

‘아얏!’

‘끝났다 끝났어 인자 괜찮다.’

아리한 아픔은 남아있지만 전처럼 심한 통증은 사라졌습니다.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인 아이는 금새 환히 웃으며 밖으로 놀러 나갑니다.

고해성사는 치유의 성사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병을 고해성사를 통해서 치유 받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치유하는 데에는 몇 가지 어려움이 뒤따릅니다.

그 어려움 중의 하나는 우리 꼬마아이가 처음 생긴 상처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과 같은 죄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사실 우리는 죄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 영향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거나 누군가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작은 죄들은 쉽게 지나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범한 지극히 작은 것들이라도 결코 그저 지나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중금속이 우리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결국엔 돌이킬 수 없는 큰 병으로 드러나듯이 우리의 일상적인 작은 허물들도 우리 내면에 점차적으로 쌓여 결국엔 더 큰 죄를 위한 발판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다짜고짜 아내를 패는 남편은 없습니다. 오랜 기간 준비되어 온 아내와의 대화의 단절, 무시나 경멸, 소홀함과 섭섭함들이 남편의 내면에 쌓이고 쌓여 결국엔 폭력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소홀함도 놓치지 않고 충실히 하느님 앞에 털어놓고 용서받을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좀 더 하느님께 합당한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고해성사를 보는 데 있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엄마가 아이의 상처를 만졌을 때 오는 통증과도 같은 고해성사를 볼 때 찾아오는 인간적인 수치심입니다.

이는 고해성사를 ‘하느님의 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하느님께 고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에게 고해한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내 치부를 드러내는 일은 분명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이미 알고 계신 것들을 드러내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한편으로 수치심은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합니다. 병에 걸렸을 때에 아픔이 없으면 참으로 좋겠지만 실제로 우리에게서 병의 고통이 사라져 버린다면 정말 우스꽝스런 모양들이 연출될 것입니다. 난로가 뜨거운 줄도 모르고 손을 얹고 있다가 손이 다 타버려 못쓰게 될 것이고 과식을 해도 배가 아픈 줄을 모를테니 먹고 싶을만큼 먹어대다가 결국 위가 터져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수치심은 우리에게 죄라는 것이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경보장치와도 같습니다.

또한 어려움이 없이 성취하게 되는 일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마라톤을 완주하면서 아무런 고통이 없다면 누구라도 다 도전할 것이고 마라톤이라는 운동은 그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이겨내야 할 고통이 있기에 우리가 하는 일들에 있어서 비로소 ‘기쁨과 보람’이라는 의미가 생겨납니다. 마찬가지로 고해성사에도 우리의 인간적 수치심이라는 고통스런 감정이 수반되기에 고해성사를 보고 난 뒤에 우리가 느끼는 해방감도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수치심 때문에 성사를 보지 않겠다는 마음자세보다는 수치심이 크면 클수록 고해 후의 기쁨도 더욱 크게 다가오리라는 마음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죄에 대해서 잘 인식하지 못하기에 또 수치심 때문에 고해성사 보기를 꺼려합니다. 하지만 대놓고 피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가 져야할 심적 부담감을 더욱 키워놓기만 합니다. 우리가 성실히 우리의 내면을 살피고 좀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다가설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곪은 상처를 매만져 깨끗하게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끝으로 실천적인 면에서 몇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성사를 가급적이면 자주 보셨으면 합니다. 동네에 쓰레기차가 1년에 한 번 왔다 간다면 우리가 사는 동네가 어떻게 될까요? 그야말로 쓰레기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누가 쓰레기를 더 갖다 버리든 말든 티도 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1년에 한 번 청소를 하는 거리가 얼마나 깨끗해질는지도 의문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깨끗하게 거리를 청소해 놓을 때에 누군가가 무심코 던져놓은 작은 쓰레기도 눈에 뜨이게 마련이고 또 누군가가 봉지째 버리는 쓰레기가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는 가급적 자주 보셔야 합니다. 참고로 신학생들은 적어도 한 달에 한번 고해성사를 봅니다.

둘째, 고해 성사 전에 성실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헐레벌떡 고해소 안에 들어와 성사를 청하고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성사를 보고 나가려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이 털어놓는 죄래야 주일미사 불참이 대다수일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미사는 빠졌고 급한대로 성체라도 모실 수 있게 얼른 보고 나오려는 심산일 것입니다. 헌데 한달 만에 목욕탕에 가면서 들어가 물만 찍 뿌리고 나온다고 우리가 깨끗해질 리가 없습니다. 차라리 물이라도 안뿌렸으면 덜 찝질할 것을 괜히 물까지 뭍혀서 더 찝질해져버립니다. 그런 찝질한 몸으로 모시는 성체가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끌어 줄지 의심스럽습니다. 간만에 하는 목욕에서 우리는 우리 몸의 때를 구석 구석 닦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성사를 보시기 전에 성실하게 성찰을 하고 들어오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내일 합동판공이전에 간단한 참회예절이 있을 예정입니다. 안내자의 인도를 받아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셋째, 고해는 짧고 굵게 하셔야 합니다. 들어오셔서 등장인물부터 시작해서 사건의 발단, 경과, 결과보고, 후속조치까지 인생 역정을 줄줄이 이야기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고해 전에 성실하게 성찰하시고 들어오셔서는 어떤 잘못을 했는지 정도만 고해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남의 죄를 고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정작 자신이 뉘우치기보다 누가 어떤 잘못을 해서 자신이 그렇게 되었다는 걸 이야기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죄를, 며느리는 시어머니 죄를, 남편은 아내의 죄를 아내는 남편의 죄를 고해하곤 합니다. 고해할 때는 자신의 내면을 잘 살피고 내 안의 어떤 부분이 그릇되었는지를 털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고해의 순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고해소 안에 들어오시면 성호를 그으시고 성사를 본 지 얼마정도 되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걸 빠뜨리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자주 성사를 보는 사람과 10년 만에 성사를 보는 사람이 같은 잘못을 고해하더라도 그 비중은 다르게 마련입니다. 마지막 성사를 본 지 얼마가 되었는지를 먼저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다음으로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죄부터 고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때로 작은 잘못들을 앞세우고 큰 잘못은 저 뒤에 속삭이듯 말해버리고 지나치려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열어놓는 만큼 온전히 용서받는다는 것을 믿고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고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해가 끝나면 사제의 훈계를 잘 들으시고 보속을 잘 들어서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행여 그 보속이 현실적으로 실천 불가능한 것이면 신부님께 꼭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컷 성사를 보고서 보속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게 됩니다. 보속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을만한 것을 받아야 합니다. 끝으로 사제의 사죄경이 이어집니다. 이때 어떤 분들은 나름대로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사죄경은 고해성사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때 다른 기도는 절대 바치지 마시고 오직 사제의 사죄경에 귀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고해성사에 관해서 가볍게 알아보았습니다. 이 모든 고해성사에 관한 내용들을 모두 앞서서 먼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죄를 덮어주고 우리를 하느님을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곁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면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루게 됩니다. 먼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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