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예레 33,16)
주님이 우리의 정의가 되는 날, 그 날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저마다의 정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주님이 정의가 아니라 다른 것을 자신의 정의의 척도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 다른 세력의 대표주자는 돈입니다. 돈이 정의의 척도가 되는 세상입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면 좋은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입니다. 부자는 의인이고 가난한 사람은 죄인입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 주는 조언이면 좋은 것이고 돈을 잃게 만드는 조언이면 피해야 할 조언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언제 우리 주님께서 ‘너희들이 세상 안에서 떵떵거리며 살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습니까?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필요한 것을 누리게 해 주셨고 가능하면 이미 가진 것으로 기뻐하고 살 줄 알라고 가르치셨지 수많은 돈을 벌어 세상에서 최고의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에서 오히려 나자로가 부자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고 가르치셨고, 가난한 과부의 비유에서 적지만 모든 것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를 두둔하셨으며, 당신부터도 태어나는 날 마땅한 자리가 없어 가축들의 구유에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재산을 믿고 있으며 그 재산이 자신의 삶을 보장해 줄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를 보살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당신의 ‘정의’를 이행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진정한 정의는 하느님만이 지니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매스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일에 흥분하면서 스스로를 정의의 사도라고 착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삶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져야 할 정의도 올바로 추스리지 못하는 겁쟁이였다는 것을 훗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참된 정의는 인터넷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모든 일의 증인이 되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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