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6)
깨어 기도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신 뒤의 모든 신앙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깨어나야 하고, 그리고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잠자는 사람은 무방비상태입니다.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합니다. 누가 와서 칼로 찌르기 직전까지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비로소 칼이 살을 비집고 들어와서 강력한 고통을 줄 때에야 잠에서 번쩍 깨어나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셈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깨어남은 육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밤에 자고 낮에 깨어 돌아 다닙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동안에는 주변 상황을 관찰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하지요. 그러나 영신은 다른 문제입니다. 육신이 환히 깨어 있어도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영혼은 무방비 상태가 되고 온갖 유혹과 위협이 다가와도 전혀 깨닫지를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유혹의 달콤함을 자기 스스로 덥석 물게 됩니다. 그것이 어둠의 영의 미끼인 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셈이지요.
쉽게 돈을 번다는 말에 혹하고, 상대의 의중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얼굴만 반들반들하면 그의 내면에 대한 성찰 없이 관계를 시작하고, 또 부유하고 권력있는 이들의 내적 공허에 대한 고려 없이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영적 장님인 셈이지요.
기도에 대해서는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깨어있지 못하니 기도를 할 리가 없지요. 기도라는 것은 영혼에 밥을 먹이는 것이고 영혼을 튼튼하게 준비시켜 주는 것입니다. 헌데 깨어있지 않은 사람이 밥을 먹지는 않는 것처럼 잠들어 있는 영혼도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외적으로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미사도 가고 묵주기도도 바칩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을 ‘의무감’에 하고 자신의 ‘평판’을 걱정해서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사참례와 신심의 행위가 아닌 것이지요. 어떤 신심 모임에서는 그 ‘차수’가 중요하고, 또 어떤 성경 공부는 어디까지 졸업을 했는지와 어떤 연수를 참여했는지가 자신의 신앙 우위를 선점하는 계기가 됩니다. 소위 해병대 차수처럼 ‘기득권’으로 작용하는 것이지요. 참으로 멍청한 짓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걸 두고 우쭐대는 꼴이라니요.
골방에 들어가서 남들이 보지 않게 기도하고, 단식하면서도 외적으로는 다른 이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온데간데 없고, 행여 묵주기도를 좀 많이 바치고 나면 그걸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고, 또 절제의 행위를 하고 나면 남들이 다 알라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다니곤 합니다.
깨어 있지도, 기도 하지도 못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진정 영혼의 눈을 뜨고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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