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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12장

12장
마리아의 향유
죽음은 결의되었고 언제라도 꼬투리만 잡아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권력가들이 합세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다시 베타니아, 즉 나자로가 죽었다가 부활한 곳에 돌아가십니다. 일어난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기쁨에 넘쳐 예수님을 환대하고 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마리아가 들어와서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습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그 향기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유다가 자신의 엇나간 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즉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어야 마땅했다고 빈정거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 역시도 그에 대해서 따로 주석을 답니다. 즉 그가 도둑이었으며 가난한 이에게 관심 따위는 가진 적이 없다고 말을 하고 있지요. 예수님은 마리아를 두둔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행하는 일의 의미를 밝혀 당신의 죽음이 이미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예고 하십니다. 즉, 그녀가 당신의 장례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라고 하시지요. 우리의 주님은 더는 이 세상에 육신의 생명을 지니고 살아 계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이들 가운데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들었을 이가 과연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라자로의 살해 계획
예수님을 향한 유다인들의 열렬한 반응 앞에서 수석 사제들은 더욱 사악한 계획을 구상합니다. 즉 라자로마저 죽여 없애기로 결의한 것이지요. 이처럼 내면에 다져진 악은 선을 앞에 두고 두 가지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뉘우침과 회개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어두움 안으로 더욱 숨어들어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체험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무언가 잘못을 했을 때에 그 잘못을 뉘우치고 솔직히 고백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 내어서 더욱 더 어둠 속에 숨어 들어가려고 하는 경우도 있지요. 복음서의 이 경우에는 바로 후자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 가십니다. 그분을 향한 유다인들의 인간적 사랑이 식지 않은 때라 열렬한 환호 속에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분의 입성 모습은 여느 세상의 왕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바로 그분은 어린 나귀를 타고 소박하게 들어가신 것이지요. 세상의 왕들이 보면 부러워하기는 커녕 우스꽝스러워 할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 앞에서 권력가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점점 더 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악을 더욱 키워나가게 됩니다. 나귀의 모습에서도 우리는 배울 것이 있습니다. 수많은 말과 소, 그 밖의 화려한 운송 수단을 두고 예수님은 굳이 어린 나귀를 선택하셨습니다. 볼품 없는 나귀였지요.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은 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 이런 나귀와 같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 재주로 인해서 지금의 사명을 수여받은 게 아니라 다만 한 가지, 주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에게 선사된 주님의 십자가 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신 당나귀일 뿐입니다. 그것도 아주 볼품 없는 어린 나귀일 뿐이지요. 이 겸손함 속에 머무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찾는 그리스인들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스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혜로움을 찾아 다니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하느님의 외아들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일이 지금 우리 주변에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미 신앙을 가졌다는 이들은 정작 예수님에게 더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지혜로움을 찾는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실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들은 필립보에게 다가가고 필립보는 안드레아에게 다가가고 결국 둘은 예수님에게 다가가게 됩니다. 이는 중재자의 역할, 메신저의 역할을 상징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 주님은 당신을 직접 드러내시지 않고 당신을 알고 있는 이들을 통해서 그들이 당신께 다가올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역할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보다 참된 지혜를 찾는 이들, 영원한 생명에 목말라하는 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메신저 역할을 해야 하고 사람들을 예수님께, 그분의 성사와 식탁 앞에, 성찬례 앞에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때의 선포
이제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고, 즉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을 찾는 모습을 보고 때가 이르렀음을 선포합니다. 그 때라는 것은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라고 하지만 그 영광이라는 것은 수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한마디로 당신이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남겨 주시지요. 아주 유명한 밀알에 대한 비유입니다. 제 목숨을 사랑하면 잃게 되고, 제 목숨을 미워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당신이 걸어가신 그 길, 수난과 죽음의 길을 따라 걸어서 아버지에게 함께 이를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요. 그러나 여전히 이 가르침은 제자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영광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기도합니다.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는 이 기도문은 그 이면에 우리의 수난을 품고 있습니다. 영광은 수난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지요. 이 세상이 순수했다면 영광은 수난 없이도 이루어질 것이었지만 이 세상은 이미 어둠에 물들어있기 때문에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수난이 필수적인 셈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일어날 일을 알고 그것에 대한 인간적인 두려움도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기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를 결심을 더욱 굳히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십니다. 즉, 땅에서 들어 올려진다고 미리 말씀을 하시지요. 광야에서 구리뱀이 들어올려져 이스라엘 백성의 목숨을 구한 것처럼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들어올려져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성이 허락하는 선에서 해석을 하고 그분에게 의문을 제기합니다. 메시아는 당연히 영원히 사실 것이지만 그 메시아는 마땅히 들어올려져 세상 사람들의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 신앙인들이 있는 모든 곳에 십자가가 존재하듯이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수난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역시도 그분의 십자가에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빛이 있는 동안 열심히 걸어가라고 미리 경고를 하십니다. 어둠이 다가오면, 즉 세상의 악이 우리에게 엄습해오기 시작하면 우리는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에 우리는 열심히 신앙 안에서 우리의 영혼을 개선하기 위해서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불신
예수님의 신기한 일을 그렇게나 보아온 유다인들이지만 믿음이 생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고 결국 그들은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며 믿지 못하는 이들이 되고 맙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설 때 그들이 보였던 찰나적인 기쁨은 그들의 의심과 불신으로 인해서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하게 되지요. 우리 역시도 신앙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 신기한 일들, 이적거리를 찾아 다니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신앙을 온전하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신기한 일을 보아서 절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적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앞에 두고도 여전히 자신의 위신을 걱정합니다. 인간들 사이에서의 입지를 걱정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인간적 두려움은 그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게 그들을 겁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역시도 믿음이 잠시 생겨나다가도 다시 세상 걱정에 그 믿음을 숨막히게 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하다못해 식당에서 성호 긋는 것도 주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을 향한 믿음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믿음은 곧 하느님을 향한 믿음에 직결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즉 근본 방향에 대한 가르침이지요. 당신이 의도하고 가르치는 것이 전혀 하느님의 뜻에서 한발짝도 떨어져 있지 않고 온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말씀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는 단순히 예수님이라는 한 인간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뜻을 거부한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에게 내려지는 심판이라는 것은 하느님이 따로 그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심판이 그에게서 이루어지고 있고 나아가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예고 하십니다. 진정한 심판이라는 것은 누군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하느님이 그를 떼어놓고 그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는 것 바로 그 자체를 말하기 때문이지요. 세상의 악한 이들은 이미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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