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주고받음이 아닙니다. 사랑은 보다 내밀한 것이고 강인한 것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사랑에 도달하지 못하고 서로간의 감각적인 사랑을 나누다가 실망해서 떠나 버리곤 하지요. 사랑은 의지적 결심이고 그것도 꾸준한 결심입니다. 즐거울 때만이 아니라 힘들 때에도 해야 하는 결심인 것이지요. 지금의 문화는 ‘감각’을 발달시켜 놓았습니다. 어딜 가나 보고 듣는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지요. 특히나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인해서 보고 듣는 컨텐츠를 더욱 빨리 만들고 소비해 버리곤 합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도 끈기가 없지요. 너도 나도 필요한 관계를 만들고 소비하고는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도 우정도 모두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관계에 있어서 인내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으로 보이지 않는 분과의 영원한 관계에도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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