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자들이 더욱 탐욕스럽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 가진 자들은 자신의 수준에서만 세상을 보려고 한다. 그러다가 하느님이 손을 들어 그의 교만을 한 번 치시기라도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이 난리를 피운다.
따뜻한 물을 늘 쓰다가 찬 물만 있는 곳에 가면 가진 자들은 난리가 난다. 하지만 늘 찬 물을 쓰다가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에 가는 이들은 하느님에게 감사할 줄 안다. 고급 승용차를 몰다가 차가 고장이 나면 가진 자들은 온통 불평을 한다. 하지만 늘 걸어 다니거나 기껏해야 버스를 타고 다니던 이가 자기 오토바이라도 하나 구하면 그들은 하느님에게 감사드린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다르게 만드신 이유는 서로 도우라는 당신의 계획이 들어있었다. 지식이 많은 이는 지식이 부족한 이를 돕고, 더 가진 자는 덜 가진 자를 돕고, 영성이 뛰어난 이는 영성이 부족한 이를 돕고, 기도할 줄 아는 이는 기도할 줄 모르는 이를 도우라는 당신의 뜻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제가 지닌 것으로 교만할 줄만 알았지 서로 돕고 살 줄을 몰랐다. 하느님이 주신 가장 단순한 두 계명인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전혀 그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울타리를 쌓고 주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든다. 왜냐하면 ‘가졌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격리, 이것이 가진 자들의 표시이다. 자신의 그룹이 아닌 타인의 그룹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들이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그들 스스라는 것을 가진 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한 번 생각을 해 보라, 없는 자들이 궁핍에 찌들려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과연 얼마나 있을 것인가? 반면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은밀하게 진행하는 어둠의 일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러나 세상은 가진 자들이 움직이는 것이고 신문 기사에는 범죄의 기사는 나오지만 가난한 이를 향한 일상적인 경멸이나 은근히 이루어지는 차별의 행위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법이다.
가진 자들의 마음은 믿음에 굼뜨다. 그들은 사랑한다는 것을 굉장히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알고 있으며 실제로는 모든 관계를 ‘이해관계’로 계산을 한다. 즉, 자신에게 유익이 되면 쓰고 유익이 되지 않으면 언제라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소비문화 속에서 살아왔고 그런 행위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정’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우정은 상호간의 거래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내가 심심할 때에 그 심심함을 채워줄 다른 심심한 이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참으로 무미 건조하고 공허하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대체품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우정’이라고 간주하고 살아간다.
만일 여러분들이 모인 자리에서 ‘돈 이야기, 정치 이야기, 신문 기사 이야기, 연예 기사 이야기’등등만이 나오고 아무도 자신이 진정으로 느끼는 것을 표현할 줄 모른다면 그 관계는 무척이나 공허한 관계에 불과하다. 그들은 가면 속에서 살고 자신의 고유한 생각이 없으며 언제나 남이 생각하는 것을 제 생각인 줄 착각하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베들레헴의 어린 아기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 인간의 도움을 받으셨다. 타인의 사랑을 받기에 주저하지 않으셨고 당신 역시도 열렬히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 유대관계야말로 진정 내적으로 부유한 사람의 좋은 표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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