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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11장

11장
라자로
예수님과 아주 절친 사이였던 한 가족이 등장합니다. 바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였지요. 특히나 마리아는 예수님과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몸을 팔아 돈을 벌어 생활했고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릴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이었지요. 헌데 그 오빠인 라자로가 병을 앓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전해 받고도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하십니다. 그리고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시지요. 그 병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병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된다고 하시지요. 이 말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이 순간 제자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사건을 도화선으로 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본격적으로’ 준비되게 되지요. 결국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두고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그 수난과 죽음은 부활로 이어지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실제 자기 앞에 마련된 수난과 죽음이 다가올 때에는 전혀 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시간을 끕니다.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시고 그리고 나서야 돌아갈 준비를 갖추십니다. 사실 라자로의 병이 죽을 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라자로의 죽음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도록 일부러 시간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낮에 다니는 자
제자들은 유다로 돌아간다는 말에 걱정을 시작합니다. 최근에 겨우 거기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빠져 나왔는데 다시 돌아간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마치 가솔린을 등에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모양새니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고 하시지요. 이는 단순히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진리의 빛이 있으면 장애물이 있어도 피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유혹이나 영적 위험이 다가와도 마찬가지이지요. 하지만 빛이 없는 자들, 빛을 잃은 자들, 영적 어두움 속에 살아가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세상 안에서 그들은 오히려 득세하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부자이고 학식이 가득하고 유명하고 권력을 쥐고 있지요. 그러나 그들은 어둠 속에서 걸어 다니는 자들이고 그래서 곧잘 넘어지고 아파하고 서로 다투는 자들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빛을 지닌 자들이고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어지는 말들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라자로의 죽음
라자로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예수님의 표현을 ‘잠들었다’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라자로는 죽었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죽음 때문에 도리어 기뻐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라자로의 죽음보다도 당신이 하게 될 일로 사람들이 믿게 될 것이 더 중요하고 기쁜 일이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은 예수님은 기쁨에 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점의 중심이 되는 자리로 다시 돌아가시고자 하십니다. 즉, 죽을 뻔한 곳으로 다시 가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토마스가 동료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고 말을 합니다. 사실 우리들도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동의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모르는 채로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행위들입니다. 하지만 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도망가 버리고 말 나약한 이들이고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준비된 일
라자로는 죽은지 이미 나흘이나 지나 있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무엇도 뒤바꿀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지요. 그 누구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때를 기다시린 것이지요. 더군다나 근처에 있던 예루살렘에서 많은 이들이 마리아와 마르타를 위로하여 모여 있었습니다. 마치 준비된 연극처럼 모든 구성 요소가 마련되어 있었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이어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마르타가 나가고 마리아는 집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루까 복음서에서 등장하듯이 마르타가 마리아더러 왜 나가지 않느냐고 핀잔을 주지도 않고 잠자코 있습니다. 마르타는 행동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하고 마리아는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필요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셈이지요. 이 역시 일종의 미리 배치된 구도인 셈입니다.

마르타와의 대화
마르타는 아직 오빠의 현실적 부활에 대해서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서 소위 투정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동시에 믿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욱 확고히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신앙을 고백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타의 이 신앙 고백을 받아들여 그녀를 서서히 준비 시킵니다. 즉 오빠가 죽음에서 일어날 것을 미리 예고를 하십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최후에 일어날 부활로 간주를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 역시 중요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잠시 뒤에 나자로가 부활할 것이지만 사실 보다 중요한 것은 마르타가 고백하는 근본적인 신앙이었지요. 우리 모두는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받아 확고히 해 주십니다. 당신이 하실 일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을 마르타의 입을 통해서 고백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즉 당신은 부활이고 생명이며 당신을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마르타에게 신앙 고백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마르타는 굳건한 신앙으로 믿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역시 이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 나자로의 부활과 같은 이적은 없지만 마르타의 근본적인 신앙고백은 우리의 몫으로 남는 것이지요. 우리는 부활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 하고 그 일을 우리 주님께서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와의 대화
마르타는 돌아가서 주님의 부르심을 마리아에게 전합니다. 마리아는 게을러서 거기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그때그때마다 보다 소중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분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부르심이 있을 때면 아무것도 주저하지 않고 그리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어 마리아와 함께 집안에 있던 유다인들도 마리아를 따라 나갑니다. 이 역시 앞으로 일어날 일의 한 준비과정인 것이지요. 가능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 목격을 하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 역시 주님께 다가가서 마르타가 한 것과 동일한 투정을 합니다. 즉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말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마리아는 마르타와는 달리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감정에 북받쳐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 역시도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 지게 됩니다. 마르타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이 이성을 사용하셨더라면 마리아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감성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로봇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고 죄 외에는 우리와 모든 면에서 동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감정이 있었고 마리아와 사람들의 눈물 앞에서 함께 마음이 북받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서 고통받는 인간들 가장 가까이에 머물러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유다인들의 반응
이어 유다인들이 저마다 반응을 보입니다. 거기에 모여 있던 수많은 유다인들, 향후 이 모든 일들의 증인이 될 유다인들은 그분의 눈물과 사랑을 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과 비판을 가합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에 언제나 있는 두 부류의 사람인 셈이지요.

나자로의 부활
이제 예수님께서는 계획하신 일을 하십니다. 먼저 돌을 치우고 무덤에서 나는 냄새를 맡게 하여 나자로가 확실히 죽어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 시키십니다. 하지만 여전히 주님이 하실 일을 이해하지 못한 마르타가 나서서 냄새가 난다고, 즉 이미 죽어 있으니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고백한 믿음, 즉 주님이 진정한 메시아라는 신앙 고백에서 한 걸음 물러나기 시작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마르타를 꾸짖으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사람들은 돌을 치웠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들으라고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소위 성사적 행위를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나자로를 일언반구의 말 한 마디 없이도 무덤에서 나오게 하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당신의 부활에서 일어났던 일이지요. 원하셨다면 돌도 저절로 움직이게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해의 수준에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은 것이지요. 모든 성사의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표지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는 이에게 제한 없이 은총을 내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약함으로 인해서 볼 수 있는 표지와 들을 수 있는 표지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감사를 사람들이 듣도록 하십니다.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일어납니다. 죽은 이가 밖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여전히 천으로 감기고 수건으로 쌓인 상태라 도움이 필요하지요. 예수님은 그 일을 사람들에게 맡깁니다. 즉, 죽음에서 일으키는 것은 하느님의 몫이지만 그가 다시 본격적인 삶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사람들에게서 빼앗아가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일으키시지만 그 영혼이 다시 일상의 삶 안에서 힘을 얻어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역할은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 신앙인들의 몫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람들의 반응
이러한 예수님의 엄청난 기적 앞에서 수많은 유다인들이 믿음을 가지기도 하지만, 역시나 그 반대의 여파로 그분을 향한 증오가 가중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절대로 고려하지 않는 부류, 그분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부류, 오직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고 자신들의 평판을 걱정하는 부류,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어 직장을 잃을 걱정을 하는 부류들입니다. 세상의 자녀들이고 빛이 없는 이들이지요.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일 결정을 내립니다. 물론 그들의 어리석은 모든 행동들마저도 하느님은 미리 알고 계셨고 예견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 나자로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결의를 굳히게 되는 것이지요. 가장 큰 하느님의 기적 앞에서 어둠은 가장 큰 죄악을 준비하는 셈입니다. 우리 역시도 이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좋은 일들 이면에는 그를 적시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박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선한 행위를 적대시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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