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은 잘못 쓰면 하느님의 선하심을 거스르는 말이 된다. 만일 누군가가 태어나면서부터 위생적으로 안전이 보장된 나라에서 태어나고 보장된 학교 교육을 받으며 비록 재벌은 아니더라도 대학교 졸업장을 딸 정도의 집안에서 자라나고 차를 굴리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자신의 자녀들이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면 그는 먹고 살기 힘든 사람이 아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은 진정으로 당장의 내일의 끼니를 하느님에게 의탁해야 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아무런 수입도 없고 일할 수 있는 능력도 없는 가난하고 늙은 노인들, 일찍 남편을 여위고 자식들도 없는 가난한 과부들,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들이나 할 수 있을 만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반대로 행동한다. 지극히 작은 것에도 하느님에게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머니가 해 주는 밥의 소중함을 알고, 어쩌다가 얻게 된 사탕 하나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인 셈이다.
하느님은 나를 볼리비아에 보내셨다. 감사를 아는 이들 사이에서 감사를 배우고 겸손히 살라고 나를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훗날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많은 열매를 거두라고 그리 하신 것이라 믿고 성실히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사제에게서 무엇을 찾는가… 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사제에게서 과연 거룩함을 찾는 것인가? 사제는 그 둘러싸인 이들의 바람과도 적지 않은 상관이 있다. 주변에 헛바람이 잔뜩 든 사람만이 있으면 사제의 관심사도 자연 그 쪽으로 쏠릴 수 밖에 없다. 아무리 하느님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하느님이 자신의 생활과 상관 없다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그 이야기가 무슨 소용일 것인가?
눈에 보이는 것만 사랑할 줄 알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랑할 줄 모르는 이들, 그들이 과연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좀 더 사실을 말해서 눈에 보이는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을 그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와 학적 지식과 교양으로 다른 이들과 갈라놓는 이들, 그들의 교만은 하늘을 찌르고 훗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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