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 12,44)
예수님은 돈과 관련된 비유를 적잖이 쓰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돈’과 관련된 것이라면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었고 실제로 우리 삶에 돈과 관련된 것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강론대 안에서 오늘날 돈과 관련된 비유를 쓰곤 합니다. 이 동네에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학비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후안시또 삔또라는 돈을 주곤 하는데 그 돈을 줄 때면 누구나 저마다 학교에 일찍 가서 아침부터 기다리곤 하지요. 하지만 그들은 미사에는 밍기적 밍기적 늦게 오는 것이 보통입니다. 물론 아예 안오는 경우도 허다하구요. 그래서 우리의 열성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그 비유를 쓰곤 합니다.
하지만 핵심은 ‘돈’이 아닙니다. 핵심은 우리가 과연 무엇에 열정을 쏟는가 하는 것이지요. 과부의 봉헌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과부가 가진 것을 다 넣었으니 신자분들도 적어도 봉헌금 수준을 얼마정도까지는 올리라는 것이 핵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 돈의 비유를 사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비유 자체로 또다시 돈에 대한 추구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이 가르침은 거의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핵심은 과연 우리의 믿음이 무엇에 근거해 있는가 하는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봉헌 행위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은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을 얼마든지 봉헌할 수 있게 됩니다. 아빠가 사탕 공장 사장이라면 그 아들은 자기 주머니에 든 사탕을 얼마든지 친구에게 나눠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모든 것을 그분을 바탕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우리가 소유한 것에 여전히 우리 자신을 맡기고 의존하고 있는지 하는 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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