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색채를 끼워넣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을 나도 마음에 들어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고위 성직자와 친분을 쌓고 싶어합니다. 굳이 고위 성직자가 아니라도 소위 ‘거룩해 보이는 사람’과 연관을 맺고 싶어하고 다른 이들을 만날 때에 그와의 친분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뭔가 중요한 인물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결국 나를 드러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본인이 스스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종교적 색채’를 띠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누군가 하느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알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그와의 친분을 남에게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거룩한 이가 지닌 영성을 배워 알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 되는 것이지요.
때로 마주하게 되는 묵주기도 단 수를 자랑하는 사람도 실은 본인이 전혀 거룩한 사람이 아닌 셈입니다. 진정 겸손한 이라면 본인이 바치는 기도를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친분을 쌓고 스스로 변화되는 삶을 통해서 그가 얼마만큼 기도하는 사람인지는 절로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울며 겨자먹기로 바치는 묵주기도 수라도 주변에 내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초라한 사람인 셈이지요.
종교적인 색채는 유명 배우라도 연기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연기가 아니라 실제 삶이 그리로 방향지워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와서 아무리 거룩한 척 연기를 하는 교리교사라도 술자리에 가서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린다면 그의 거룩한 연기는 모두 물거품이 되는 셈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척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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