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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마타 1,54)

이와 비슷한 구절이 신약에도 등장합니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마르 13,14)

과거에는 ‘제단’이 있었습니다. 제물을 불살라 바치는 신성한 장소로 취급 되었지요. 물론 오늘날에도 성당마다 제단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라고 지시한 일을 말이지요.

예수님은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른 성전을 세우겠노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당신을 통한 세로운 교회를 말씀하신 것이었지요. 참된 마음의 성소에 하느님을 모시고 하나되어 살아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제단’의 개념이 바뀌게 됩니다.

참된 제단은 이전처럼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제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 안에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나날이 바치는 곳이 진정한 제단이 되는 것이지요.

과거에는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실제로 들어서곤 했습니다. 이상한 이단적 상징물이 제단 위에 떡하니 버티고 서곤 했지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 전혀 다른 제단 위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탐욕과 이기성을 말합니다.

우리의 내면은 하느님의 몫이 되어야 하고 그분의 사랑이 들어서야 하는 곳입니다. 헌데 우리는 우리의 이기성과 탐욕으로 그 안에 전혀 엉뚱한 것을 집어넣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게 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마음은 언제나 사람을 황폐하게 하고 주변과의 관계를 모조리 파괴해 버리고 마는 법이니까요.

여전히 사람들은 일상 안에서 이런 선택의 기로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그분의 사랑을 마음 속에 심고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아가지만 다른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마음 속에 탐욕과 이기심을 잔뜩 채워넣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준비된 예언자가 아니라면, 그저 소박한 하느님의 양떼에 불과하다면 이런 모습 앞에서 우리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마음 속에 이기심과 탐욕이 가득한 이들과 맞서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산’, 즉 예수님이 늘 기도하시러 올라가신 곳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마주할 때에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가 없이는 이기심과 탐욕의 한복판에서 살아남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처럼 황폐해진 마음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없이 산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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