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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 정결, 순명

오늘 수녀원에서는 특별 피정이 있었습니다. 위령의 날이라 이곳은 마치 추석 분위기와 비슷하거든요. 그래서 학교도 쉬고 수녀님들도 이날 휴식을 취하면서 성사도 보고 함께 미사도 드리고 미사 중에 특강을 했습니다.

수도자의 3가지 서원(청빈, 정결, 순명)을 주제로 강의를 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해야 하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수녀님들의 고해를 들으면서 먼저 치워야 할 게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치우는 작업을 먼저 했습니다. 마음 안에 깨끗한 보물과도 같은 3가지 서원을 자리 잡게 해야 하는데 그 전에 먼저 자리잡고 있던 것들을 좀 치워내었지요.

바로 ‘이기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기 자신들’이 놓여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거기에서 모든 가치들의 파괴가 이루어집니다. 이기심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해서 조성되는 소중한 가치들을 파괴하거든요. 그래서 이 이기심이 왜 우리 봉헌의 삶에 합당하지 않은지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깨끗해진 자리에 다시 하느님을 모시도록 했지요. 우리가 하느님에게 와서 하느님에게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 우리의 참된 행복의 근원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상기 시켰습니다.

그리고나서 세가지 주제를 이야기했습니다.

가난 - 참된 가난은 하느님 외에 원하는 것이 없는 가난이라고 설명을 했지요. 아무리 현실적으로 가난하다고 해도 마음이 탐욕스러우면 그는 가난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수도자가 아무리 청빈 허원을 하고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 제한된다 하더라도 그 중에서도 탐내는 것이 생기면 가난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쳤지요.

정결 - 참된 정결은 단순히 외적으로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오직 하느님 외에는 다른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마리아 막달레나도 진실로 정결할 수 있었다고 가르쳤지요. 비록 과거에 어리석음 속에서 살아왔지만 예수님을 만나고부터는 진실로 정결한 존재가 된 셈이지요.

순명 - 순명의 근본은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물론 양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은 순명할 의무가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순명이 힘든 것은 서로 다른 방식을 고집하고 그 가운데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더 낫기 때문에 그런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에게로 나아가기 위해서 순명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무엇보다도 순명의 장점은 ‘안전’하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순명을 할 때에 나에게는 그 일에 대한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 셈이니까요.

강의를 마치고는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먼저 닭고기국(로끄로)가 나오길래 이곳 관습대로 당연히 2차로 본 음식이 나올 줄 알았는데 물어보니 로끄로가 전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두그릇 먹었습니다. 배가 고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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