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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가상의 대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17,21)

- 어디 말입니까? 주님? 우리 가운데 어디 말입니까? 보여주십시오.

- 이미 보고 있지 않느냐? 너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니 너희를 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주님, 답답해 미칠 지경입니다. 저희가 그 하늘나라를 보게 되면 그것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칠 것입니다. 한 번만 보여주십시오.

-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 없구나. 이미 보고 있는 걸 보지 못한다고 하니 어리석고, 또 너희가 원하는 식으로 볼 수도 없는 걸 보여달라고 하니 다시 한 번 어리석구나. 하늘 나라는 너희의 두 눈의 증거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늘 나라는 너희가 볼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너희는 두 눈으로 사물들을 분별하고 그것의 정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온 것이다. 너희가 보지 않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에게 왔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이 바로 하늘나라다. 하지만 너희는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고 보여달라고 하고 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설명해주마.

너희가 원하는 것은 유토피아와 같은 세상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아니면 너희들 눈에 색다르게 보이는 어떤 세상을 기대하고 있지. 하지만 그런 세상은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너희의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너희는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너희는 훗날 하늘나라가 지금의 세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고는 참으로 이상하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내면의 성질은 완전히 다른 것이지.

하늘 나라는 간단히 말하면 하느님의 권능이 온 누리 곳곳에 미치는 나라이다. 그럼 너희들은 물을 것이다. 지금의 이 세상에는 하느님의 권능이 미치지 못하느냐고 말이지. 그렇다. 지금 이 세상에도 하느님은 빠짐없이 은총을 내려주고 계신다. 심지어는 악한 이들에게도 필요한 비와 빛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문제는 너희의 영혼이다. 너희의 영혼 안에 들어있는 ‘자유의지’이다. 너희의 자유는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느냐? 그렇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실이 그러하니까. 너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힘겨워한다. 심지어는 두려워하기까지 하지. 그래서 이 세상, 지금 너희가 발붙이고 있는 세상은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시지만 바로 너희의 그 마음,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마음 안에는 하느님께서 자리하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나 예수를 통해서 온전히 이루어지고 그리고 나의 제자들과 그들의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초대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이 은총에 익숙해지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에게도 하느님의 뜻이 충만히 자리잡고 하느님의 나라는 펼쳐지기 시작할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주님, 알 듯 하면서도 여전히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조금만 더 풀이해 주십시오.

- 보아라. 여기 한 아이가 보이느냐? 이 아이의 마음은 맑다. 하지만 맑을 뿐, 선도 악도 깃들어있지 않지. 만일 너희가 이 아이 앞에서 그릇된 모범을 보이면 이 아이의 마음은 악으로 물들게 된다. 반대로 너희가 이 아이에게 선한 표양을 보이면 이 아이의 마음은 선으로 물들게 되지. 너희들은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완성되지 않았다. 그것이 선한 씨앗이든 악한 씨앗이든 너희들이 물을 주고 가꾸는 것에 따라서 그것이 자라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이미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씨앗이다. 그 하느님의 나라라는 씨앗을 너희가 어떻게 가꾸고 키우느냐에 따라서 너희의 삶과, 너희의 가족과, 너희의 공동체는 자라나게 될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 사람들의 얼굴과 복장은 중요한 게 아니다. 너희들은 그들이 무엇을 실천하고 있는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관찰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자라나고 있고 열매를 맺고 있다.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나 그 열매를 맺고 다른 이들을 감화시키고 있지. 그러나 안심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사탄이 악의 씨앗을 뿌려 두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언제나 활동하고 있다. 너희들이 이 정도면 완성 되었다고 방심하는 순간에 사탄은 너희들을 유혹해서 넘어뜨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세상을 이겼기 때문이다. 내 양들인 너희들은 겁내지 말고 오직 나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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